지난 토요일 텃밭에 다녀왔다. 지난해 가을 겨울초, 갓, 봄동 등을 이랑 곳곳에 한 무더기씩 심었는데 봄볕이 따사로워 지니 어떻게 자랐을까 싶어서였다. 또한 한쪽 끝에 있는 겨울초를 뽑아내고 그곳에 상추와 부추를 심자는 아내의 제안때문이기도 했다. 아내는 겨울 초 중 잎이 큰 녀석들은 칼로 잘라내고, 작은 것은 뿌리채 뽑아냈다. 그 뿌리를 보고 잎은 작은데 뿌리는 크고 실하다고 감탄을 했다.
겨울초는 봄볕이 조금 더 강해지는 사월이 되면 잎도 무성해지고, 꽃대도 쑥 나온다. 그때까지 잎이 자라는 3월 초나 중기에 잎을 따먹지 않으면 잎도 억세진다. 꽃대가 올라오면 먹을 수 없다. 꽃은 유채 꽃처럼 노랗다. 유채꽃과 구별하기 쉽지 않다. 키도 꽤 자란다. 씨를 받아 이듬해 뿌릴 생각이 아니라면 그 전에 갈아엎어야 한다. 먹지도 못하고, 꽃도 어디서나 볼 수 있지만 겨울초 입장에서는 최선의 모습이다.
어제저녁 아내는 지인을 만나고 와서 짜증이 난다고 투덜거렸다. 그 지인은 학원에서 초등학생과 중학생을 가르친다. 아내는 가끔 그와 만나 차를 마시면서 수다를 떨고 온다. 어제도 그랬던 모양이었다. 그 자리에서 그는 서울에는 웬만한 아이들은 중학생쯤 되면 고등학교 수학과 과학을 끝낸다는 얘기를 했던 모양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2류나 3류 인생을 살 수밖에 없다는 얘기도 덧붙였다고 했다. 그 순간 우리 아이들이 생각나 아내는 스스로 자책할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였다. 아이들을 그렇게 키우지 못해 우리 아이들이 2류 혹은 3류 인생을 살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고 나에게 하소연 하는 것이었다.
몇 년 전 모 과학고에 근무할 때 중학교 2학년 영재반 학생 수업을 했다. 그때 한 학생과 면담하면서 놀란 적이 있다. 그 학생은 영재원에 다니는 이유가 내가 근무하는 과학고에 진학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과학고에 진학하기 위해 언제부터 준비하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낯빛이 어두워졌다.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준비했는데 많은 학생들이 4학년부터 준비한다고 했다. 학원에서 그 학생은 이미 늦어서 과학고 진학이 힘들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했다. 나는 늦지 않았다고, 중학교 공부를 충실히 하고, 책을 많이 읽어라고, 위로와 조언을 했다.
나는 약 20년 동안 과학영재학교, 과학고 등에서 과학영재라는 학생들을 가르쳤다. 모두 뛰어난 학생이었다. 면담해보면 그들 대부분은 초등학교 때부터 준비했던 학생들이었다. 학부모 면담에서도 그런 얘기는 공공연하게 했다. 과학고를 진학해야 더 나은 곳으로 진학할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었다.
무한경쟁의 장에서 살아가기 위해 어쩌면 일찍부터 학원과 과외를 하면서 선행학습을 해야 하는 것이 요즘 시대를 잘 살아가는 방법인지도 모른다. 옆 사람이 어떻게 준비하는지를 보면서 뒤지지 않기 위해 곁눈질을 열심히 해야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런데 재능은 아이 머릿속에 지식을 수셔 넣는다고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다양한 경험을 쌓고,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자신이 좋아하는 것과 쉽게 익힐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과정에서 드러난다. 초・중학교에서는 겨울 초가 겨우내 잎은 키우지 못했지만 뿌리는 실하게 만든 것처럼 학생도 그렇게 바탕을 튼튼히 하면 된다.
봄볕이 따스하게 비치는 때가 되면 겨울 초가 꽃을 피우듯 때가 되면 아이도 자신이 잘할 수 있고, 즐기는 일에서 잎은 무성해지고 꽃도 피우게 될 것이다. 아이들은 저마다 꽃을 품고 있다. 그 꽃이 어떤 모양과 색을 드러낼지 알 수 없다. 아이가 어릴 때 열심히 학원을 보낸다고 예쁜 꽃을 피우는 것은 아니다. 뿌리가 튼튼해야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있다. 무엇이 아이 뿌리를 튼튼하게 만드는 일인지 고민하는 것이 부모나 교사가 해야 할이 아닐까. 겨울초 뿌리를 들어 보이며 아내를 위로하는 상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