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회화나무 아래에 묻힌 고양이다.
내가 죽었을 때, 그는 나를 집 앞 작은 정원에 묻었고 내 몸 위에 작은 회화나무를 심어주었다. 이제 막 여름에 접어들 때였는데 유별나게 노란색 잎이 반짝이던 나무였다.
한 평도 되지 않는 작은 땅이어서 나무 하나 만으로도 정원은 꽉 찼다.
왜 하필 회화나무였을까? 아마도 회화나무의 황금색 잎이 나의 윤기 나는 털색과 닮아서가 아닐까 짐작하지만 그에게 물어볼 수 없으니 알 수는 없다. 시간이 지나며 길고 예쁜 손가락 같은 뿌리가 내 몸을 조금씩 감싸더니 어느새 몸 안으로 들어와 버렸다. 무례하다거나 기분 나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뿌리는 노크를 하듯 내 몸을 살짝 두드렸고 살 안으로 파고들 때는 그의 장난스런 손길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말이 없는 회화나무와 말할 수 없었던 나는 뿌리와 털로 서로를 보듬었다. 세 번의 여름을 보내는 동안 나무와 난 거의 한 몸이 되었다.
뿌리는 내 정맥과 연결되었고 이제는 피가 아닌 맑고 투명한 물이 내 몸을 흐른다. 털도 썩어 없어진 탓에 난 투명한 고양이가 되었다.
회화나무는 나의 황금색 털을 흡수해 가지와 잎이 모두 황금색이 되었다. 여린 잎들 하나하나가 나의 털만큼 소중했다. 잎을 떨군 겨울에는 가지가 더 노래졌는데, 허전한 가지 위에 개똥지빠귀가 놀러와 외로움을 달래 줬다. 예전 그의 마당에서 살 때는 새들을 많이 괴롭혔었다. 처음부터 괴롭힐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마당 가운데에 우뚝 서 있던 매실나무에는 온갖 새들이 놀러오곤 했는데, 즐겁게 지저귀는 새들과 어울리고 싶었을 뿐이었다. 없는 듯 슬쩍 무리에 끼려고 살금살금 다가가는 나를 보고 놀라서 날아오르는 새를 무심결에 낚아챘다. 마음과 다르게 몸이 먼저 움직였고 발톱에 걸린 새는 좀 전의 지저귐보다 더 높고 큰 소리로 울었다. 묘한 쾌감이 발을 타고 전해졌다.
몇 번의 환생 전에 느꼈던 감각이 다시금 되살아나는 순간이었다.
이 때부터 심심하면, 새를 노렸다. 확 낚아채서 발로 꾹 눌러놓고 새가 우는 소리를 들었다. 소리가 잦아들면 송곳니로 머리를 살짝 물었다. 그러면 또 짹짹 노래를 불렀다.
다시 잦아들면, 위로 던졌다가 다시 낚아챘다. 새가 더 이상 울지 않을 때까지 놀이는 계속되었고 그 때 즈음이면 새는 움직이지 않았다. 아마도 나처럼 이미 죽음을 맞이하였을 것이었다.
지금은 새를 괴롭히지 못한다. 그저 땅 밑에서 새의 노래 소리를 듣고 있을 뿐이다. ‘종족을 그렇게나 많이 괴롭혔는데, 내가 이런 호사를 누릴 자격이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나무는 바람에 흔들려 새가 날아가지 않도록 더 가지를 꼿꼿이 세워줬다.
나무와 한 몸이 되어 이 작은 정원을 떠나지 않는 건, 이 집에 그가 있기 때문이다.
난 그의 영역 안에 있는 것에 행복감을 느낀다. 그의 냄새, 그의 장소 안에 있는 것이 얼마나 편안하고 따뜻한지 알기에 다시금 고단한 길 위의 삶을 산다는 것은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그가 사는 집이 바로 옆이라 정원에 있으면, 창문으로 그의 모습을 잠깐 씩 볼 수 있었고 열린 창문 틈으로 그의 냄새가 실려 오기도 했다. 나무의 잎이 서로 부딪혀 서걱서걱 소리를 낼 만큼의 바람이 불면 그는 창문을 활짝 열고 위태해 보이는 자세로 창턱에 걸터앉았다. 시선은 저 멀리 지는 해에 닿아 있었다. 그가 나를 보고 있지 않은 서운함보다 잠시 그를 볼 수 있는 기쁨이 더 컸다.
나는 비가 오는 날이 싫었다. 그를 볼 수 없었고 창문은 굳게 닫혀 있었기 때문인데, 나의 투정을 나무는 이해하지 못했다.
나무는 모든 가지와 잎을 펼쳐 환호해야 할 때에 저 뿌리 밑에서 고양이가 짜증을 부리고 있으니 빨아드리는 빗물이 썼다. 고양이의 튼실한 살집 덕에 가지를 살찌우는 덕은 봤지만 이제 뼈만 남고 투정만 느는 고양이가 슬슬 귀찮아지는 나무였다.
그는 너무나 바빠 보였다. 아침 출근길에 스치듯 지나가고는 달빛도 없는 늦은 시간에 휘청거리는 몸으로 돌아왔다. 눈길도 거의 주지 않았다. ‘이럴 거면 나를 왜 자기 정원에 묻은 거야?’ 야속한 마음도 들었다. 그러다가도 주말 아침이면, 그는 자기의 정원으로 놀러 나왔다. 말 그대로 진짜 놀고 있었다. 해도 해도 일이 끝이 없다는 투정과 다르게 얼굴은 방싯 웃으면서 한 평 남짓한 정원에 오전 내내 머무를 때가 많았다. 잡초를 하나하나 손으로 뽑아내고 모종삽으로 땅을 뒤집으면서 정원을 아주 조금씩 넓혀갔다. 잎이 꺾인 상사화가 안쓰러워 말을 걸고 모종삽에 걸려 나온 지렁이에게도 말을 건네다가 정원을 떠날 때 즈음에 노란 잎의 회화나무를 한참 바라봤다. 그의 눈길에는 미안함과 대견함이 함께 있었는데, 나무에게는 무탈하고 튼튼하게 잘 자라고 있음에 대한 고마움이 담긴 말을 건넸고 나에게는 이렇게 말했다.
“포도야 거기서 잘 있지? 나무가 저리 잘 크는 게 다 네 덕분인거 알아. 네가 곁에서 우리 가족을 잘 지켜봐줘서 이번 주도 무탈하게 지나갔네. 앞으로도 잘 부탁해”
그렇다. 그는 날 포도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나를 직접 봤더라면, 왜 포도라고 부르는지 더 이해가 가지 않을 것이다. 난 해질녘 가을 들판보다 더 빛나는 황금색 털을 가지고 있으며, 짧았던 털의 윤기는 공단보다 더했고 보드라웠으니까.
아~ 그러니까 코숏(코리안 숏헤어)이란 말이란 말이지? 라고 코웃음을 칠지도 모르겠지만 난 보통의 코숏이 아니다. 거의 완벽에 가까운 비율을 가지고 있으며 눈도 크고 까맣다. 배와 발은 눈처럼 희고 내 목소리에 날 쳐다보지 않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 그도 사료 봉지에 인쇄되어 있던 고양이 모델을 보고는 나와 정말 똑같다며, 포도는 언제 광고를 찍었지? 하고 얘기해준 적도 있었다.
무엇보다 다른 고양이와 완벽하게 다른 점이 있는데, 그건 내가 환생을 하는 재주가 있다는 것이다. 어떤 이유에서 환생을 하게 됐는지 나는 모른다. 어쩌면 나만 환생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모든 고양이가 윤회의 삶을 살고 있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전생을 기억하는 고양이는 내가 유일했다. 내가 만났던 모든 고양이에게 전생의 삶을 물었을 때, 그 고양이들은 눈만 깜빡였다.
그러니까 나만 전생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일 거다. 이것이 다른 고양이와 가장 다른 점이고 내가 특별한 고양이라는 증거다.
내가 마지막으로 죽었을 때, 난 당분간은 환생을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내게 집이라는 존재의 의미를 알게 해 준 그가 내게는 여전히 영혼을 쉬게 할 집이기 때문이다. 그가 자기의 울타리 안에 여전히 나란 존재가 살아가고 있음을 눈치 챘으면 더 좋았겠지만. 그래도 그의 독백 속에서 내가 여전히 마음에 남아 있음을 알기에 그가 내개 돌아올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그의 곁에, 아니 나의 옆에 그가 없다는 것을 상상해본 적도 없다. 그와 며칠 씩 떨어져 있던 적도 있었지만 난 늘 그가 돌아올 것을 알았다. 그가 떨어져 있던 날을 오히려 못 견디고 나를 찾아와 볼을 비비고 뽀뽀를 하던 때가 많았기에 난 오히려 도도한 척, 귀찮은 척 그의 애를 태웠다. 그랬던 그를 어떻게 떠날 수 있을까?
그 역시 내가 떠나는 걸 받아들이지 못해서 이렇게 자기 집 정원에 나를 묻지 않았는가? 나를 기억하기 위해서 나를 닮은 황금회화나무를 심었던 것일 테고.
내가 죽던 그 순간, 난 그의 책상 위 낡은 스웨터가 사무치게 그리웠다. 검은색의 폭신하고 그의 냄새가 묻어 있던 스웨터. 언젠가 그의 무릎 위에 앉아 스웨터에 코를 박고 발로 꾹꾹 누르며 다독거려주고 있었다. 힘들어하는 그에게 마음을 담아 내 작은 발로 위로해주고 싶었다.
그는 얼굴을 찡그리더니 나를 꼭 안아주고는 스웨터를 벗어서 책상 위에 깔고 내가 앉기 편하게 모양을 잡아줬다. 이 때부터 스웨터는 나만의 침대가 되었다.
폭신했던 스웨터 위로 돌아가고 싶었다. 눈이 흐릿해지는 그 순간에도.
그는 회화나무 아래 나를 묻을 때에 스웨터를 땅 위에 깔아주었다.
내 마음이 그에게 전해졌다고 믿는다. 그 간절했던 바람이.
이런데 내가 어떻게 그를 떠날 수 있을까. 나의 마음은 죽을 때의 그 마음으로 고정되어 버렸다. 새로운 추억은 더 이상 쌓을 수 없지만 쌓였던 추억은 나와 함께 땅에 묻혀 김칫독의 김치마냥 곰 삯고 있다. 살아 있는 것들과 놀기를 좋아하던 내가 죽어 꼼짝없이 땅에 갇혀 있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옛날 그 와의 추억을 되새김질 하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쌓아 놓은 추억들이 소설책 한 권 분량은 될 것이다. 어차피 나도 과묵한 나무를 붙들고 수다를 떠는 것도 지쳤으니 내 얘기를 좀 들어주면 어떨까?
뭐부터 시작해볼까?
일단 그와의 첫 만남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