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더 눈과 함께 배우는, 나이 듦의 미학
고무 패킹이 닳아 신상 수경을 장만했다. 수경을 고르면서 알게 되었다. 세상엔 정말 다양한 종류의 수경이 존재한다는 것을. 패킹 수경, 노패킹 수경, 미러 수경, 노미러 수경. 여러 고민 끝에 노패킹 수경으로 바꿨고, 그렇게 나의 수경 수난시대가 시작되었다.
노패킹 수경 안으로 물이 가득 들어왔다. 의도치 않게 눈알 세수를 하게 되며 다시 패킹 수경으로 바꿀까 고민했다. 후회를 거듭하다, 일주일만 신상 수경에게 기회를 줘보기로 했다.
노패킹 수경은 패킹이 없는 대신 코받침 조절을 통해 수경을 얼굴에 딱 맞춰줘야 한다. 얼굴 사이즈를 과대평가해서 코받침을 넓게 해줬더니 수경 안이 샤워장이 되었다. 다시 코받침을 좁게 조절했다.
수영을 하는 건지, 수경 테스트를 하는 건지 모를 일주일을 보냈다.
드디어. 수경 안으로 물이 안 들어오는 기적 같은 시간이 왔다. 인고의 시간 끝에 결국 노패킹 수경에 적응했구나 싶어 뿌듯했다.
'패킹이 있던 자리에 패킹이 없으니 시야도 넓고 정말 좋네~'
수영 후 룰루랄라 머리에 샴푸칠을 하다가 우연히 거울을 봤다.
헉. 팬더 곰이 있었다. 아니, 눈밑도 쾅하게 패여 있다.
수경 안으로 물이 안 들어오게 하려고 너무 밀착시켰나? 이넘의 수경! 이제 적응했나 싶었더니 내게 이런 팬더의 굴욕을 안겨주다니!
챗GPT에게 물었다. 노패킹 수경을 착용하면 눈밑 꺼짐 현상이 발생하는 건지.
"수경 자국이 오래 남는 이유는 압박, 혈액·림프 순환 저하, 얇은 눈밑 피부 구조 때문이며..."
주절주절 긴 설명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수경에 압착을 너무 세게 줘서 눈밑 패임이 생기게 되며, 오래도록 패임 현상이 지속되는 것은 얇은 피부와 피부 탄력 감소 때문이라고 한다.
해석하자면, 센 압착은 패임 현상을 유발하지만 패임이 지속되는 것은 노화 현상이라는 것이다.
아. 슬프다. 수경 탓이 아니었다.
노화 탓이었다. 하루하루 성숙해지는 나이 덕분이었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자신의 한계를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는 일이다."라는 말이 떠올랐다.
수경 자국 하나에도 한계가 드러나는구나 싶었다. 예전엔 수경을 아무리 세게 눌러도 금방 사라지던 자국들. 이젠 한 시간이 지나도 희미하게 남아 있다. 피부는 정직하다. 시간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다.
처음엔 억울했다. 수경을 원망했다. 하지만 수경은 아무런 잘못이 없었다. 그저 나의 피부가, 나의 몸이 변화하고 있을 뿐이었다.
받아들이기로 했다. 팬더 눈도, 눈밑 패임도, 이 모든 게 결국 내가 물속에서 버티는 법을 배워온 시간들이라고. 처음 수영을 시작했을 때, 물이 무서워 수경을 꽉 눌러 쓰던 날들. 25미터를 쉬지 않고 헤엄치기 위해 숨을 참으며 수경 너머로 남은 거리를 가늠하던 날들. 킥판을 잡고 발차기 연습을 하며 벽 타일을 하나씩 세던 날들.
수경 자국은 그 모든 순간의 기록이었다. 물과 싸우지 않고 물과 함께 가는 법을 익혀온 시간의 증표였다. 나이 먹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거울 속 팬더에게 말을 걸었다.
"그래, 우리 이제 천천히 나이 먹자. 수경 자국 정도야."
어차피 한 시간이면 사라질 자국이다. 길어야 반나절. 그리고 내일이면 또 수영장에 갈 것이고, 또다시 팬더가 될 것이다. 매번 새롭게 생겼다 사라지는 이 자국처럼, 나도 매일 조금씩 변하고 있다.
그게 나의 일상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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