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멀 디너
그날 친구 F는 게스트를 데리고 포멀디너에 참석하려 했다. 드레스와 정장을 빼입고, 힐을 신고 하하호호 웃으며 메인 홀(main hall)로 향했다.
하지만F는 시작 시간보다 2분 늦게 도착해버렸고, 자비 없이 굳게 닫힌 Hall의 문을 마주했다. F는 문을 닫은 책임자에게 고작 2분인데, 들어갈 수 없겠냐고 사정했다. 솔직히아무리 "격식 있는 자리"라고 해도 따지고 보면 그냥 차려입고 모여서 밥먹는 거고, 문이야 잠깐 열면 되는 건데 열어주지 못할 이유가 있는 건아니니 말이다.
하지만 책임자는 단호했다.
"안 돼. 못 들어가. 방금 종 친 거 들었지? 라틴어 낭독이 끝났어. 음식이 다 축복받았는데 너희는 못 받은 거야. 그 둘이 섞일 순 없어."
1학년 때의 일이다. 내가 거짓말을 하고있는 것 같다면 놀라지 않길 바란다. 실화다. 나를 포함한 케임브릿지 학생들도 정상이라 생각할 상황은 아니지만, '케임브릿지라면'하고 고개를 끄덕일만한 상황이기도 하다. 내가 경험한 케임브릿지는 그런곳이다.
먼저 위 일화에서 나온 '포멀디너'에 대한 설명을 하는 게 맞겠다.
해리포터를 참 많이도 우려먹지만 진짜 비슷한 점이 많아서 어쩔 수가 없다. 한 번만 더 쓰겠다. 포멀디너란 해리포터로 치면 연회(feast)다. 다른 점이라면 그들은 공짜 밥을 먹고, 우린 돈을 낸다는 것.
포멀디너를 가려면 먼저 본인 컬리지에서 이 연회같은 저녁식사(포멀디너)가 열리는 날이 언제인지 확인해야 한다. 열리는 날은 컬리지마다, 상황마다 다르다.
그 다음, 온라인 시스템으로 예약을 마치고 예약한 날 시작시간 15분 전에 줄을 서서 들어간다. 컬리지마다 포멀디너의 문화가 다르기 때문에 시작 전 포멀에 가는 사람들이 모여 음료를 마시는 pre-drink를 제공하는 곳도 있다.
그렇게 포멀디너가 열리는 메인 홀(main hall)에 들어가면 상석(high table)과 그 아래로 일반석 테이블들이 준비되어 있는데, 상석에 컬리지 소속 교수님들(fellow들)이, 일반석에 학생들이 앉는다. 예약 빼고는 해리포터의 연회와 정말 비슷하다.
학생들이 먼저 와 자리를 잡고, 시작 시간이 되면 문을 닫고 펠로우들이 들어온다. 그들이 자리에 앉으면 종을 치고 라틴어 문장을 읽는다. 이 라틴어읽기가 내 친구 F가 받지 못한 "축복(bless)"이다. 컬리지마다 얼마나 깐깐한지가 다르지만 원칙적으로는 포멀디너 중에는 사진을 찍을 수 없다. 음식 서빙이 시작되고 식사를 즐기다 펠로우가 나가고 나서부터 사진을 찍을 수 있다.
대부분의 College에서 포멀디너는식전빵, 어패타이저, 메인, 디저트, 그리고 따라 나오는 커피 혹은 차로 이루어진 3코스 식사다. Festive Hall이라고 이벤트성 포멀디너를 할 때는 4코스 식사가 되기도 한다. 10-25파운드 언저리로 코스요리를 먹을 수 있으니 물가 비싼영국에선 비용적으로도 만족스럽다.
두 번째 글(머글판 해리포터)에서 해리포터의 시스템과 영국의 문화가 같다는 걸 발견했을 때 '이런 문화가 자기 나라에 있으면 나같아도 0부터 다 만들진 않았겠다'고 생각했단 이야기를 기억하시는가.
여태 이야기한대로 케임브릿지와 해리포터의 시스템은 공통점을 많이 가지고 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아주 똑같진 않다. 하지만 다른 부분들이 해리포터보다 '못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어쩌면 케임브릿지가 한술 더 뜰지도 모른다.
케임브릿지는 겉치레 빼고는 특별한 목적 없는 문화를 많이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포멀 디너에 갈 때는 정장이나 드레스를 빼입어야 하고 '가운'이란 것을 걸쳐줘야 한다. 가운을 걸치기만 하면 되는 것도 아니다. 가운도 골치아픈 규칙을 가지고있는데, 어떤 컬리지 출신이냐, 어떤 과정(학사, 박사 등등)을 하고있냐, 나이가 어떻게 되냐, 케임브릿지에서 학사를 했느냐 다른 학교 졸업생이냐에 따라 가운의 모양이 바뀐다.
식사를 시작하기 전 축복을 내리겠답시고 종을 치고 발음도 잘 모르는 라틴어 문장을 낭독하는 건 또 어떤가. 식사 중간에 늦게 들어오는 것도 안 된다. 놀라운 건 이것이 끝이 아니란 것. 하지만 포멀 디너와 관련 없는 겉치레식 문화는 뒤의 에피소드들을 위해 남겨두겠다.
여러분은 우리들의 이런 허례허식이 어떻게 느껴지시는가?
재미있는가, 골치아픈가?
학생들 사이에서도 호불호가 갈린다. 나는 '호' 쪽이다. 굳이 해야할 필요는 없는 짓들을 통해 일종의 문화를 만드는 것 같아 나는 좋다. 무엇보다 해가 저물고 어둠이 찾아오면 영국의 대표 자전거 도시인 케임브릿지에서는정장을 입고 가운을 휘날리며 차도에서 자전거를 타는 풍경을볼수 있다. 이런 풍경도 살면서 한 번쯤은 봐야 하지 않겠는가?
케임브릿지의 컬리지들은 닫힌 사회를 구성하고 있어서 자기 컬리지 사람이 아니면 문을 잘 안 열어준다. 포멀 디너도 마찬가지. 특정한 컬리지의 포멀에 가고싶으면 그 컬리지의 멤버를 친구로 만들어야 한다. 초대를 받아야만 갈 수 있다. 위에서 말했듯 굳이 그럴 필요 없는 짓거리지만 이런 독점적인 분위기, 나는 케임브릿지만의 미련한 문화인 것 같아 마음에 든다.
초대를 받아야 한다는 단점이 있지만 컬리지마다 메인 홀의 모양이 다르고 서빙되는 음식의 트렌드도 달라 컬리지마다 친구를 사귀어서 포멀에 초대되는 재미도 쏠쏠하다.
예를 들어 St. John's College는 돈 많고 오래된컬리지답게 커다랗고 금박 장식을 마구 단 멋진 Hall을 가지고 있지만 음식은 그닥 맛이 없다. 실험정신만 투철해서 언제는 일주일 내내 패션푸르트와 연관된 디저트만 서빙한 적도 있고, 소금 외 아무 맛도 나지 않는 생크림케이크를 서빙한 적도 있다.
Girton College의 경우 '음식은 축복받았지만 너네는 아니니 꺼져라'라고 말한 존스와는 정 반대로10분정도 늦게 도착하자 라틴어 읽기가 끝나고 문을 열어주는 관대함을 보였다.
또, 존스는 주 6회 포멀을 개최하는 반면 Newnham College같은 곳은 달에 세 번이던가 주에 세 번으로 개최 횟수가 적어서 예약하기가 힘들고 Magdelene College는 인조등 없이 촛불만으로 메인 홀 전체를 밝히고 식사하는 'Candlelit Dinner'를 한다.
포멀디너만 봐도 컬리지마다 문화가 이리 다르니이전 글에서 컬리지마다 대학의 경험이 달라질 거라 말한 게 무슨 의미인지 이해가 가는가?
쌀쌀맞게 학생들을 내치는 컬리지보다는 늦어도 '잠깐 열어줄게 들어가'라며 용서해주는 곳이 더 친절한 분위기를 제공할 것이고 거대하고 웅장한 Hall을 가진 컬리지가 그렇지 않은 곳보다 돈 많고 장대한 느낌을 줄 것이다. 이런 미묘한 차이들이 모여 컬리지의 대략적인 성격과 분위기를 결정한다.
글을 다 읽은 여러분은 글의 상단에 소개된 일화를 다시 읽어보시길 바란다. 처음 이 에피소드에 들어올 때보다는 상황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라면 뭐... 어쩔 수 없지만.
그치만 이런 말도 안되는 공간이 세상에 존재하는데 가보고 싶지 않다면 나는 이해할 수 없을 것 같다. 내가 이상한 걸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오늘의 글은 여기서 마친다. 다음 글도 케임브릿지의 또 다른 이상한 문화를 소개할 생각이니 이번 글의 내용이 재미있었다면 다음 글도 관심 가져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