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케스트라나 클래식 음악이 쿨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미드를 볼 때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클래식 음악에 대체 왜 그렇게 손을 대고 좋은 대학을 가는 너드들은 왜 다 클래식 음악을 하나씩 하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던 2학년 어느날, L과 오케스트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유독 주변에 클래식 음악을 듣거나 악기를 다루는 친구들이 많이 보이는 시기였다. 미국 출신인 L도 오보에와 잉글리시 호른을 다룰 줄 알았다.
한국에서, 아니 영국에서도 케임브릿지 이전에는 클래식 음악을 듣는 인간들을 만나본 적이 없었다. '너는 음악 뭐 들어?'라고 물었을 때 사람들이 질문하는 건 '힙합 좋아해 RnB좋아해 아니면 케이팝 좋아해?'의 의미였지 'POP들어 클래식 들어 재즈 들어?'의 의미가 아니었다. 이들에게는 달랐다.
플릇까지는 봤어도 오보에를 다루는 사람을 만난 건 처음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적어도 내가 다닌 학교에서는 일어나지 않는 일이었다. 오보에는 아이들이 집중마저도 하지 않는 음악시간 교과서 안에만, 그리고 내가 절대 이해할 수 없었던 미드 안에만 존재했다.
내가 물었다.
"대체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클래식 음악을 하는 거야?"
질문은 '클래식 음악은 쿨하지도 않은데 대체 왜?'의 의미였다.
"여기 케임브릿지야."
그가 답했다.
"그래서?"
내가 물었다.
"overachiever(지나치게 성취한/하려는 사람)가 많다는 소리지."
잠깐 사고회로가 멈췄다. 그러니까, 이 아이의 말은 '클래식 음악'을 하는 게 뭔가의 '성취'로 진정 취급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우리는 근본부터 믿고 있는 것이 달랐다. 몸에 스며들어있는 문화가 달랐던 것이다.
누군가 "나 플릇으로 오케스트라 해"라고 말하면 "오 짱이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하지만 속으로는 '대체 왜? 어쩌다가 플릇을?'라고 생각할 게 뻔하다. 그만큼 적은 사람이 선택하는 취미고, 많은 사람이 쿨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 일이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플릇을 불게 된 경위가 궁금해진다.
나만의 관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클래식 음악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는 내가 그에 대한 관점을 혼자 수립하는 게 더 이상하거니와, 피아니스트 조성진의 인터뷰 중 "클래식의 대중화보다 대중의 클래식화를 바란다"는 이야기가 나왔단 것 자체가 우리들이 얼마나 클래식을 모르는지, 대중문화와 얼마나 거리가 있는지를 대변하고 있지 않은가.
어릴 적 조성진씨와 조수미씨의 이야기를 들었으나 그들이 어느정도의 성취를 이뤄낸건지 감을 잡기 어려웠다. 반면 방탄소년단이 빌보드 1위를 했을 때는 그게 어느 정도의 의미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사람들은 클래식을 하지 않았다. 플릇보다는 기타나 실용음악 건반이 더 대중의 입맛이고 쿨해보이니까.
지금껏 나는 미드를 이해할 수 없었다. 거기에 등장하는 애들은 왜 항상 클래식을 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미드의 아이들이 클래식 음악을 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그게 정말로 'cool'하니까. 쿨할 수 있으니까.
케임브릿지의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에게 있어 클래식 음악은 진실로 'cool'했다.
여기서 내가 짚고 싶은 부분은, 클래식 음악이 실제로 'Cool'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L과 이야기하기 전까지 이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한국의 Cool함
내가 느낀 한국에서의 '쿨함'은 제한적이고 거대했다.
예를 들어 학교에 다닐 시절 아이돌 산업의 영향은 모든 학생을 커버하는 것 같았다. '쿨한' 사람은 무릇 좋아하는 아이돌이 있었고, 최신 곡들을 알았다. 체육대회에서 아이돌같은 화장을 할 줄 알았고 클래식보다는 힙합을 들었다.
졸업한 뒤에도 한국 친구들과 대화하면 그들이 믿는 쿨함이란 엇비슷했고 거의 모든 사람들이 비슷한 가치를 쫓는 것 같았다. 명문대를 다니든 사회에서 만났든 비슷했다. 우리가 믿는 '쿨함'이란 서로 그렇게 다르지 않았다.
F의 Cool함
'한국'이 외모 집착이 심하다는 말을, 미의 기준이 자비 없이 높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거, 외국 기준이 낮은 거 아닌가?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해왔다.
마르고 s라인이 아닌 몸매가 어떻게 아름다울 수 있는지, 또렷한 이목구비가 아닌 얼굴이 어떻게 잘생기고 예쁠 수 있는지 잘 상상이 되지 않았다. 예쁘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매력적인 연애 대상이 될 수 있을지도 상상하기 어려웠다.
다른 쿨함을 상상할 수 없었다. 외모가 다가 아님을, 덜 중요할 수 있음을 믿기 어려웠다.
그러던 나는 1학년 때 친구 F를 만났다. 그녀는 한국 기준 멋진 몸매를 가진 것도, 화려한 미인인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나는 그녀가 쿨하다고 느꼈다. 그녀가 매력적인 건 '대신 성격이 좋아'가 아니었다. 정말 순수하게, 아무런 대체 수식어 없이 한국의 다른 모든 쿨한 사람들과 동등하게 쿨해보였다.
예쁘지 않았는데 예쁨이 주는 것과 동일한 분위기를 풍겼고, 대중적으로 선호되는 몸매에서 벗어났음에도 그 사람들 못지않게 멋졌다.
실제로 그녀는 당당했고 많은 데이트에 나갔다. 인기가 많았고 F를 아는 사람들을 만나면 그들은 그녀를'쿨한 애'라고 서술했다.
외모 컴플렉스는 예외 없이 전 지구인이 가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F는 예외였다. 확신컨대 그녀에게 바디 컴플렉스같은 건 없다. 그녀는 자신을 탓하는 대신 '일반인이 모델과 같은 외모 기준을 가진다는 건 말도 안 돼. 외모는 그들의 직업이고 전문성이야. 그 전문성을 가지기 위해서 갈아넣는 시간이랑 노력을 일반인이 한다고? 하ㅋ' 라고 진심과 근거를 담아 말하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F는 단언컨대 똑똑한 사람이었다. 저널리즘을 공부하는 F는 상식이 많고 의견이 또렷했다. 사회 현상에 대한 이해가 깊었다.
하지만 동시에 파티를 즐길 줄 알았고 재미있게 노는 법도 알았다. 패스트패션을 따라가지 않고 자선 가게(charity shop)이나 빈티지 샵에서 중고 옷들을 샀지만 그 옷들의 매칭이 언제나 스타일리시했다.
F는 내가 처음으로 접한 다른 종류의 쿨함이었다.
다른 Cool함
나는 베스킨라빈스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좋아하지만 '사랑에 빠진 딸기'도 좋아한다. 만약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절판된다면 아쉽긴 하지만 내 세상이 끝나진 않을 것이다. 사랑에 빠진 딸기로 갈아타면 되니까.
세상에는 수많은 대체품이 존재한다. Cool함도 마찬가지다. 대체 Cool함을 목격한 적 없기 때문에 믿기 어려울 뿐이다.
F를 만나기 전까지는, 케임브릿지 아이들을 만나기 전까지는 몰랐다. 다른 쿨함이 존재하고 있는지, 내가 한 가지의 쿨함만을 믿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말이다.
경험이란 단순히 '나 이거 해봤어'를 의미하지 않는다. 시야를 넓힌다는 건 '나 사막가서 낙타 타봤다?'를 의미하지 않는다.
아는 것만큼만 볼 수 있고, 보지 못한 건 믿기 어렵다.
이들을 목격했기에, 다른 사회에 살아봤기에 비로소 내가 믿을 수 있는 범위는 넓어질 수 있었다. 나는 더이상 단 하나의 몸매만이 아름답다고 생각하지 않고, 단 하나의 얼굴만이 미의 기준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말뿐이 아닌 진정으로 그럴 수 있는 방법을 볼 수 있다. 'Cool함'이란 하나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