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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없이 가볍고 가벼운
Jul 08. 2023
기사님 도봉역이요. 빨리 좀 부탁드려요.
오늘은 타 기관과 합동조사를 나가는 날이다. 조사지가 외진 곳이라 택시가 기피한다 하여 상대기관 차량을 얻어 타기로 하고 10시에 도봉역에서 만나기로 했었다.
그런데 지금 도봉산역. 어제 만나는 장소를 언급할 때마다 자꾸 도봉산역이 입에 붙기에, 농담으로 직원들과 이러다가 도봉산역에 가 있는 거 아니냐며 시시덕거렸는데. 말은 씨가 된다. 씨앗 그거 아무 데나 함부로 뿌리는 거 아니다.
너무 당황해서 일단 직원들과 협조기관 담당자들은 먼저 출발하라 하고 택시를 잡았다. 도봉역이라 말씀드렸지만 기사님 느낌이 이 험한 길도 별말 없이 가주실 것 같은 분위기라 얼른 목적지 주소를 불러본다. 되돌아갈 수 없을 것 같은 이상한 시골길 끝에서 택시를 내리면서 기사님께 연신 죄송하다 사과드린다. 늦지 않게 도착했다. 다행이다.
저 멀리 건물 앞에 계장님이 보인다. 우리 계장님 과묵하시고 표정 없기로 유명하신 분인데 나를 보고 활짝 웃으신다. 저렇게도 밝게 웃으시는 분이구나. 부끄럽지만 너스레를 떨어본다. 어머, 죄송해요 계장님. 제가 원래 잘 안 그러는데. 정신이 빠졌나 봐요.
안으로 들어간다. 동료가 오묘한 표정을 짓는다. 지금 당장 놀리고 싶은데 꾹 참는 표정이다. 아니나 달라, 협조기관 담당자들과 헤어지자마자 신나서 놀려댄다. 어제 그렇게 말했는데 어떻게 거길 가 있냐며. 아니, 놀리고 싶어서 어떻게 참았어. 고마해. 이 양반아.
본디 오늘 나는 큰 역할이 없었지만 그래도 놀랬을 직원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담아 밥을 산다. 그래도 놀림은 끝나지 않는다. 밥 샀자나 이제 그만~ 아침에 애들 때문에 정신이 쏙 빠져서 그래. 이런 역사가 없었는데. 늙었나 봐.
엉뚱한 약속 장소에 가는 그런 일은 없었지만, 그래. 사실 나는 헐랭이가 맞다. 약속도 잘 잊어서 이래저래 스케줄이 꼬이는 일도 종종 있고, 밤새워 만든 사내 대회용 동영상 최종본에 영문 오타를 대문짝만 하게 게시하지 않나, 눈이 빠지게 검토하고 완벽하다 생각했던 국장님 보고용 보고서에 발송기관이 떡하니 잘못 적혀 있는 것을 못 보고 문서를 올린 적도 있다.
대부분의 큰 조직이 그러하듯, 내가 몸담은 이곳 또한 혁신보다는 안정을 기대한다. 과정 중에 돌발요소를 만할 위험이 있는 새로운 시도보다는 과거에 검증된 방법으로 한치의 어긋남 없이 정밀하게 진행되는 것을 선호한다. 정밀함이라니! 나와 진짜 안 어울리는 단어다.
그래서 지난 20여 년 동안 나 참 고생 많았다. 헐랭함을 감추느라 항상 고군분투했다. 허술함은 우리 조직에서 큰 단점임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기에 항상 긴장하고 근무했다. 그러나 간혹 기운이 빠진 날, 업무 과부하가 온 날은 여지없이 실수를 했고 그것을 발견할 때마다 스스로를 너무나 자책했다. 모자란 사람인가? 부족한 사람인가? 나는 도대체 왜 이 모양인가?
그러다가 우연히 사내 강사업무를 맡으며 알게 되었다. 자료를 찾고 새로운 교안을 준비하는 일은 너무도 신선했다. 강의 대회도 밤을 새워서 준비했다. 수십 년을 똑같이 만들어온 달력 디자인도 홍보업무를 맡자마자 새로운 디자인으로 교체했다. 고생스럽지만 힘이 난다. 나는 새로운 일을 할 때 신이 나는 사람이다.
어쩌면 창의적이고, 참신함을 사랑하며, 그러다 보니 정확성을 요하는 업무들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반복을 지겨워했나 보다. 그럴 수 있지. 나를 조금 이해하게 되었다. 창의적이어서 정교하지 못한 나를 그럴 수 있지 하고 끄덕일 수 있게 되었다.
예전에 <섹스 앤 더시티>라는 드라마에서 그런 장면을 본 적이 있다. 에이든이 만드는 테이블에 큰 흠이 있는 것을 보고 의아해하는 캐리에게 그는 가구를 쓰다듬으며 설명한다. 나무의 상처를 잘 다듬어서 예쁜 무늬가 되게 하는 거야. 흠이 독특한 무늬가 되어 이 테이블을 특별하게 하는 거라고.
엉뚱하게 도봉산역에 다녀온 나를 귀엽다 여겨준다. 늘 무료해하는 동료들 또 한 번 웃겨줬다 생각해 본다. 위기상황을 나름 잘 극복한 순발력을 칭찬해 준다. 왜 이러나 비하하지 않는다.
쓰담쓰담해 준다. 흠이 아닌 사랑스러운 무늬, 나의 독특한 결이 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