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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너 사랑하냐?


또 시작이다.


울었다 하면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지칠 때까지 울어대는 저 화끈함. 미약한 시작 따위는 용납지 않는다. 무조건 본론으로 들어가 싸이렌 데시벨로 울어대는 저 넘치는 박력. 내 새끼지만 이해할 수 없다. 아무래도 내 새끼가 아닌 것 같다.


일단 울기 시작하면 답이 없다. 한밤이고 새벽이고 들쳐 업고 밖으로 나가야 한다. 이웃에서 항의라도 들어오면 난감하니까. 그렇게 몇 시간씩 동네를 떠도는 밤마실, 새벽 마실을 나가면 절로 눈물이 난다. 남들은 보기만 해도 예쁘다던데. 눈에 넣어도 안 아프다던데. 난 마냥 이쁘지가 않다. 잠도 못 자게 하고, 먹지도 못하게 하고, 상그지 꼴로 이 거리를 새벽이슬 맞으며 헤매게 하는 이 녀석을 어찌 사랑하라는 건가. 모성애는 본성이라는데. 난 아무래도 모성애가 없나 보다. 애가 계속 운다. 네가 왜 우냐. 울고 싶은 건 나다.


빽빽 울던 그 애는 지금 10살이다. 이제는 제법 말로 의사를 표현할 수 있어서 웬만한 문제들은 대화로 해결해 나가는 엄청 사랑스럽고 점잖은 아이다…라고 말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요 녀석은 여전히 짜증을 부리고 제 기분이 풀릴 때까지 한 시간은 가뿐히 울어 젖힌다. 이제는 발 동동하고 울어서 의자도 넘어뜨리고, 유연하게 움직이는 손꾸락으로 지우개도 집어던진다. 말까지 할 수 있으니 혼내면 '어쩔티비' 이러면서 제법 말대꾸도 하며 내 화를 돋운다. 홍길동도 아닌데 형아를 형아라 부르지 못하고 꼭 친구 마냥 이름석자를 시원하게 불러 젖히는 상남자스러움도 여전하다.


그래도 난 이 아이를 사랑한다. 마냥 귀엽고, 예쁘다. 경쟁심에 불타서 게임이건 큐브 맞추기 건 원하는 대로 될 때까지 도전하는 모습은 약간 존경스럽다. 난 어릴 때 참 어른을 무서워했던 거 같은데 나와 달리 형아에게도 어른들에게 자기감정도 잘 표현하는 것도 기특하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이 미운 이유와 비스므리한 이유로  녀석을 사랑한다. 한마디로 무논리. 그냥 사랑하는 거다. 이유 없이. 이 아이가 내게로 왔을 때  녀석을 싫어할 100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동시에 사랑할 100가지 이유도 있었다. 그때 내가 낳은 아이라는 이유로 사랑하기로 결심했나 보다.


20대에 처음 접했던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은 어디 한 줄 이해 가는 부분이 없었는데 두 아이를 낳고 키운 지금, 다른 책을 읽은 것처럼  새삼스럽게 느껴진다.  그는 사랑은 태도라 말한다.  내게 이 문장은 사랑할  때  그 대상이 누구인지가 중요한지가 아니라  사람을, 어쩌면 세상을 사랑하겠다는 태도. 의지의 문제라는 의미로  다가왔다.


틈만 나면 동화 속 왕자님 공상을 하던 10대와 왕자님 같은 남자 친구를 꿈꿨던 20대를 지나, 30대엔 왕자님이라 여겼던 남편이 사실은 웬수임을 깨닫고 ‘사랑 따위 없다’를 외치다가, 어린 두 아이들을 키우며 곧 지천명을 앞둔 이제야 조금 알게 되었다. 사랑에 빠질만한 자격을 갖춘 사람을 찾기보다 먼저 사랑할 태도부터 갖춰야 한다는 사실을. 사랑을 하려면 내가 사랑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다가가야 한다는 것을.


오늘도 수학문제를 풀다가 안 풀린다고 성질을 부 너를, 나는 사랑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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