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9월 12일(2018년 8월 30일 폐암수술)
2022년 추석 연휴 기간 중 남편과 1박 2일의 시간을 함께 보냈다.
서울에서 지내고 있는 남편은 야간 근무를 마치고 9월 11일 일요일 아침 9시 기차로 강릉에 도착했다.
마중하며 기다릴 수 있는 주차구역에 주차하기 위해 역 주변을 두 번이나 돌았다. 대기 구역에서의 주차 시간은 20분을 넘기면 주차위반이 되기 때문이다.
역 안으로부터 걸어 나오는 남편의 모습이 조금은 피곤해 보였다. 거의 늘 웃는 표정 없이 무표정이나 굳은 표정이다.
1박 2일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1주일 전부터 고민하면서 준비했다. 남편과 둘만의 시간을 거의 보내지 않았기에 더욱 긴장되기도 하고 답답한 마음도 잠깐씩 스쳐 갔다.
결혼한 지 33년이 되었으나 부부로서 대화의 시간을 모두 합쳐도 하루도 안 될 것이다.
그런 우리 부부가 이틀을 단둘이만 보내야 한다.
"이번 명절에 강릉에서 둘이 같이 보내요. 펜션 방이 있어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대화하는 시간을 갖고 싶어요. 지금까지의 수수는 이제 다른 모습으로 변했어요. 계속 변화해 갈 거고요. 예전의 수수는 없어요. 그 이야기를 할 거예요."
나는 남편에게 다른 기대를 하지 말라는 경고로 이렇게 미리 말을 해 놓았다.
폐암 수술 후, 나는 강릉과 포항, 제주를 오가며 지냈다. 지금은 강릉에서 생활하고 있다.
남편은 결혼 전부터 지금까지 계속 담배를 피운다. 집안에서도 피우는 담배 연기로 나는 늘 신경이 예민해지곤 했다. 폐암이라는 선고받고는 수술 후에 담배를 피우는 남편과 떨어져 지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고, 지금까지 그렇게 해오고 있다. 다행히 아이들의 도움으로 아들이 있는 강릉에서, 또 딸이 있던 포항에서 외롭지 않게 잘 지낼 수 있었다.
이렇게 남편을 떠나 생활을 한 지가 이제 4년이 넘었다.
남편은 "혼자 사는 것도 이제 지쳤어."라며 이제 서울 집에 들어오라고 말한다.
"난 못가. 아직도 담배를 그대로 피우잖아. 그리고 당신이 집안에서 하는 말과 행동이 나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부분들이 많아서 이제는 같이 못 있겠어요."
4년 동안에 가끔 만날 때마다 이러한 대화를 해왔다.
폐암 수술 전까지 남편과 나는 여느 보통 부부들처럼 한 번도 떨어져서 살아 본 적이 없었다. 가치관이 너무도 달라서일까 아니면 서로 대화를 할 줄 몰라서일까? 우리 부부는 대화하지 못하고 살아왔다. 욱하는 말투의 남편을 상대하여 대화할 수 있는 지혜와 아량이 나에게 부족한 탓이었을까?
밤늦은 시간에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와 크게 들리는 텔레비전 소리에 나는 늘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좁은 집 안에 있는 작은 화장실에서 나오는 담배 연기에 매일 시달려야 했다. 직장에서 돌아오면 집에서 벌어지는 실랑이는 항상 똑같았다.
"텔레비전 소리 좀 줄여 줘요."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 때문에 잠을 못 자겠어요. 아침에 돌리면 안 돼요? 지금 자정인데 다른 집에서 방해된다고요."
"담배 연기, 밖에서 좀 파고들어 와요."
남편은 저녁에 벗은 옷을 속옷 한 가지라도 세탁기에 바로 돌린다. 담배는 화장실에 들어갈 때마다 피운다. 그 연기는 고스란히 좁은 집 안에 있는 가족이 맡게 된다. 텔레비전은 밤늦도록 볼륨을 크게 켜고 본다.
나의 하소연에는 항상 무반응이거나 오히려 짜증과 화를 내며 언성을 높이기에 그저 그대로 참고 견뎌내기를 반복해 왔다.
자녀들이 태어나 성장할 때까지는 회사 일로 바쁘다며 밤늦은 시간이나 새벽에 들어 오는 일들이 많았기에 집안일이라고는 전혀 신경도 쓰지 않았었는데 딸아이가 중학생이 되면서부터 집안일을 통째로 자신의 취향대로 하기 시작했다. 설거지를 해놓으면 제대로 안 되어 있다고 다시 한다. 줄곧 이러한 패턴이 지속되었다.
남편이 나에게 반응하는 모든 것은 나를 무시하여 함부로 하는 것으로 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이러한 남편을 무서워하면서 살아왔다. 남편이 하는 말에 긴장하고 행동에 두려워하면서 그 상황들을 피하면서 살려고 안간힘을 써왔다고 표현할 수 있다.
그렇게 살아 온 모습들을 이제 다시 반복하고 싶지 않다. 폐암 수술 후 나에게는 남편을 떠나 나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이 얼마나 비참한 일인가!
다행히 아들과 딸이 다 성장하여 서울 집에 함께 있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랬기에 그렇게 집을 떠나 나의 건강을 회복시킬 수 있는 곳으로 피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익숙한 환경에서 떠나서 있으니 무언가 잘못된 듯한 마음으로 불안함이 밀려오기도 했다. 미우나 고우나 함께 있었던 남편을 내가 의지하고 있었던 것을 더욱 느낄 수 있었다.
이러한 마음들을 잘 어루만지며 지나서 온 시간이 벌써 4년이 되었다.
'내가 어떻게 남편을 불러서 이야기하자고 할 수 있을까?'나 자신에게 스스로 놀랐다. 그리고 대견스러웠다. 4년 동안 몸과 마음의 건강을 회복시킨 것이다.
남편과 처음으로 1박 2일 동안 대화의 시간을 보냈다.
"오늘은 내가 맛있는 것 살 테니까 내일은 당신이 사줘요."
강릉역에서 남편을 만났다. 남편의 얼굴은 늘 그렇듯이 일그러진 표정이다. 하지만 나는 이제는 그런 표정에 아랑곳하지 않고 당당하고 기쁜 표정과 말투로 남편을 이끌기 시작했다.
예전 같았으면 남편의 표정에 바로 주눅이 들고 내 마음도 바로 지치고 같은 표정으로 두려움과 함께 변해갔을 것이다.
식사할 때는 음식 이야기를 하면서 즐겁게 식사를 할 수 있도록 말을 이끌어 갔다. 차를 타고 이동할 때나 바닷가를 산책할 때는 앞으로의 삶의 방향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남편은 대화하다가 가끔 언성을 높이고 화를 냈지만 그럴 때도 이제는 그 상황에 주눅 들지 않고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그 화를 이기지 못하고 대화의 자리를 또 걸으면서 담배를 피우고 오는 남편을 다시 평안한 말과 표정으로 대할 수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예전 같았으면 남편이 한번 화를 내고 나면 그다음에는 대화를 이어갈 수도 없었고 서로 마주 보고 있지도 못했었다. 그런데 남편은 다시 돌아와 나의 말을 들었다. 나도 그 자리에 아무런 마음의 아픔도 처절함도 느끼지 않고 담담한 모습으로 오히려 남편을 어르고 있었다.
"우리 이제 정말 좋은 친구처럼 살아가는 거야. 서로 평행선으로 존중하며 살아가는 거야. 명령은 없어요. 우리 이제 아들딸에게 물려 줄 부모의 모습을 찾아가요. 그 아이들이 험난한 세상을 살아갈 때 엄마 아빠가 살아가는 모습을 보며 힘을 얻을 수 있도록 그런 부모의 모습을 유산으로 남겨 주고 싶어요. 우리 둘 그리고 아들딸, 모두 평행선을 걸어요. 모두가 성인이에요. 누구에게도 명령이나 강요하지 말아요."
"좋은 책들도 읽고, 좋은 공동체에도 들어가고, 봉사도 취미도 찾아봐요. 지금 당장 다 하자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시작해요."
"예전의 나는 없어요."
폐암 수술 후 나는 변했다. 남편과 함께 있는 모습이 변했다. 지금이 참 좋다. 자유 함을 찾았다. 남편에게 움켜쥠 당한 느낌으로 살아왔던 나의 존재를 자유롭게 다시 찾았다. 남편이 어떻게 느낀든 나는 그렇다.
폐암 수술 후 남편과의 모습이다. 결혼 전에 꿈꾸었던 좋은 부부의 모습을 늘 그려보며 나는 소망을 버리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