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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맘러브스유 Sep 05. 2023

20년 만에 받은 사과

자책하지 마세요



20년 만에 부모님이 내게 사과했다.
아니 그것은 자책에 가까웠다.






불안장애, 공황장애, 우울증



나는 30살쯤에 불안장애 진단을 받았다. 하지만 놀랍지 않았다. 불안장애라는 질병이 존재하는지도 몰랐지만 내 마음은 언제나 불안했다. 더부살이하던 4~5살 때는 할머니나 친척집 집에서 예쁘고 착한 아이가 되지 않으면 쫓겨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물론 할머니나 친지들이 내게 그렇게 말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린 나이에도 나를 지켜줄 울타리인 엄마 아빠는 곁에 없었다. 사실 그때까지 전화로만 엄마 아빠 목소리만 가뭄에 콩 나듯 들었기에 나에겐 모르는 아저씨 아줌마와 다름없었다. 초등학생 때는 한 창 부부싸움의 강도가 심했다. 그때는 아빠가 또 술을 먹고 집에 올까 봐 두려 웠고, 늘 회사 생활로 바빴던 엄마도 집에 없으니 집을 혼자 지티는 일이 많았다. 그때는 연탄불이 꺼지면 번개탄을 사서 연탄불을 갈 생각에 조마조마했다. 중학교 때는 아버지의 직업상 외국에서 3년을 살아야 했다. 엄마도 함께였고 아빠도 함께였지만 알파벳 순서도 잘 몰랐던 나는 파란 눈의 외국인들과 전혀 알아듣지 못할 수업을 들으며 선생님이 나를 발표를 시킬까 봐 매일이 불안했다. 고등학교 때는 다시 한국에 들어왔고 미대입시를 준비했지만 이렇게 해서 대학은 갈 수 있는 것인지 너무 막연한 내 미래가 불안했다. 대학생 때는 부모님이 이혼을 해서 앞에 걱정하고 두려웠던 것에서는 해방된 부분들이 있지만 이제 이 세상에서 내가 계획하고 내가 결정하고 내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생각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평온한 일상에서 무언가가 크게 닥쳐올 것만 같은 불안은 늘 존재했다. 경제적으로도 넉넉하지 못하고 하늘과 땅이 돼줄 울타리도 사라졌으니 믿을 것은 오직 나 하나뿐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더 친절해지고 더 밝게 웃었고 더 싹싹하게 굴었다. 그 덕분에 곁에 있는 사람들도 늘어났고 사회적 평판이 좋았다. 개인사나 가정사만 빼면 완벽해질 수도 있다는 생각에 난 거의 완벽에 가깝게 생활하고 일하기 위해서 나를 검열하고 나를 채찍질 했다. 그렇게 난 남들이 모두 부러워하는 직장을 갖게 되었다. 취업을 해서도 남들보다 덜 자고 더 많이 일을 했다. 내가 한 일에는 결점이 없어애 했고 다 똑같이 세끼 먹는데 흠이 잡히거나 욕먹는 건 절대 싫었다. 그리게 내 회사도 아닌 회사를 마치 내 회사인 것처럼 다니니까 점점 아프기 시작했다. 물론 병원에 가면 특정한 병명이 나오 지는 않았다. 그래도 아무 백그라운드가 없는 내게는 내 세울 것이 붙임 성과 뭐든 맡기면 완벽에 가깝게 하는 성과뿐이었다. 그때도 회사 고가와 평판은 좋았지만 언제 이 평화가 깨질지가 두려웠다. 그래서 더 세 개 쳇바퀴를 굴렸다. 내가 사라지고 내 몸이 닿는지도 모르고 말이다. 그리고 모든 걸 털어 버리고 남편과 결혼해서 유학을 갔을 때는 쳇바퀴 도는 환경에서 벗어나서 다행이다라고 생각했지만 늘 열심히 하고 완벽을 추구하는 내게는 유학생활도 입시처럼 나는 달달 볶으면서 학점을 유지했다. 타국에서 생활은 정신적으로 불안했다. 총기를 소지하는 나라에 있다는 것과 가족과 친지 친구들이 없는 낯선 땅에 남편과 단둘이라는 점도 불안했다. 지금 생각하면 나는 늘 조급해했고 누군가에게든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컸던 것 같다. 그런 내면의 깊이에는 불안이라는 감정이 늘 깔려 있었다.



미국에서 남편은 대학원에 진학했고 유학을 마친 나는 임신 준비를 했다. 3년 동안의 노력에도 아이가 생기지 않아 나는 공황장애까지 겪게 되었다. 그리고 공황장애를 한 차례 치료하고 6년 만에 임신을 했다. 그러나 임신 중에 공황장애는 또 발병을 하였다. 아이를 위해서 죽기 아니면 까물어 치기로 약을 먹지 않고 공황장애를 견뎠다. 말이 10개월이지 내게는 10년 같은 임신기간이었다. 그렇게 아이를 출산하고 한국에 들어와 육아에만 전념했다. 어린이집도 되도록 늦게 보내고 양가 부모님의 도움도 받지 않고 오롯이 아이를 키웠다. 그렇게 출산, 육아 그리고 양육을 10년째 하다가 나는 우울증에 걸렸다. 약을 먹어도 점점 더 우울증은 깊어만 갔다. 불안증으로 시작한 약이 공황장애에 우울증까지 걸리고 번아웃이 오자 엄마 아빠는 각각 나에게 전화를 걸어서 서로 자신의 탓이라고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다. 우울증 때문에 침대와 한 몸이 되어가고 짜증만 늘어가는 나를 보면서 엄마 아빠는 자책했다.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사과를 내가 정신과 약을 먹고 심리치료를 받으러 다니자 그때 했다. 별 감흥은 없었다. 왜냐하면 모든 이혼 가정의 아이들이 우울증이나 불안장애를 겪는 것은 아니니까. 난 그것을 부모의 이혼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건 무리가 있다. 분명한 것은 나는 그 시기에 더 악착같이 내가 나의 삶을 개척하고 도전했으며 여기까지 온 것에 대해 만족한다. 결핍이 나를 이끄는 힘이 되었으니 어찌 보면 이혼이 더 홀로 서기를 하는데 긍정적인 영향도 꽤 끼쳤다고 생각한다.



나는 나의 부모가 자책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진짜 이렇게 된 원인 중에 몇 퍼센트가 이혼 때문이었는지도 알 수 없는 일에 지금 괴로워할 필요는 없다. 우울증이나 공황장애는 현대인이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질병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책한다고 모든 게 원상태로 돌아가지도 않을 뿐더러 원상태로 돌아가는 것도 원치 않는다. 나는 지금 이대로가 서로에게 좋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서로가 서로에게 공격하지 않는 이 상태가 평온이다.






절대 어제를 후회하지 마세요,
인생은 오늘의 내 안에 있고
내일도 마찬가지입니다.

                                       -론 허바드 -







 


이미지 출처: unsplash.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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