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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솔매 Nov 25. 2024

선생님과 나


선생님 눈물을 닦으세요

나는 한 걸음 떨어진 곳에서 선생님이 부서지는 모습을 전부 보았습니다


나는 몸이 아픈 것을 참지 못하는 사람

몸이 아픈 것보다 정신이 아픈 것을 더욱 참지 못하는 사람이라

선생님의 눈물을 닦아드릴 자격이 없습니다

선생님의 눈물을 닦아줄 수 있는 사람은 겨울만 되면 뒤꿈치가 갈라져 피가 흐르는 사람

상반신과 하반신이 절단되는 꿈을 꾸고도

앞마당 개집에서 출산한 어미 개의 고단한 낯을 지나칠 수 없어서 우두커니 멈추는 사람

한 주먹 남은 쌀밥을 싹싹 긁어내서 국에 말아주고 저는 내복 바지에 허리띠를 졸라매는

그런 사람이어야만

     

그런 사람이어야만


어느 시인*은 두 번째로 슬픈 사람이 첫 번째로 슬픈 사람을 생각하며 쓰는 것이

시라고

하던데

      

선생님, 저는요 첫 번째로 아픈 사람이 두 번째로 아픈 사람의 발을 씻어주는 것이

인생인 것만 같던데. 이 불공정한, 이 알 수 없는, 이 아리송한……

절대로 첫 번째로 아픈 사람의 발을 두 번째로 아픈 사람이 씻어주는 일은 없고,

두 번째로 아픈 사람에게 그런 일은 허락될 수가 없고

눈물의 온도에 맞추어진 맑은 온수가 점점 탁해지는 것을 속수무책 바라볼 수밖에

없는 것일까요 오늘 밤 선생님은 제게 발을 씻어주겠다고 하시겠군요

     

이스가리옷의 환생이 아닌 저는 선생님을 팔아넘길 마음이 조금도 없으므로

선생님이 제 발을 씻어주시겠다고 하는 것은 그저 혼자 죽으려는 준비인가요

스스로 죽을 때를 아는 국화꽃은 고상하더라고

선생님이 말씀하셨을 때,

내 마음의 조약돌은 붉게 발광하였습니다 한때는 무해한 미소를 짓던 하얀 그것이

당신의 핏기 없는 한마디에 지옥문 문지기의 신장 결석같이 징그러운 것이 되었고

     

우리의 다리가 얽혔던 밤이 그날이었을까요

기억이 나지 않는군요

     

선생님 왜 그리 고초하십니까 왜 그리 눈물이 빠르게 말라버리십니까

나는 아직 울지 못했는데 이미 저만치 멀어져버린 당신의 선선한 뒷모습 가벼운 발걸음

하늘에서 뚝뚝 흘러내린 저녘놀을 즈려밟는 가뿐함 인생은 때로 산책일 뿐인 것 같다고

말하는 당신에게서 나는 은은한 향냄새를 맡습니다

     

향냄새에서 살냄새를 맡고 살냄새에서 향냄새를 맡습니다

나의 후각은 약해져가고 있습니다 품을 수 없는 냄새를 자꾸 품으니까 그것도 죄라고

나의 후각은 죽어가고 있지만

나의 마음은 기어이 죽지 않았습니다

호곡하는 혼 하나를 조심히 추슬러 명계로 인도하는 길라잡이가 되려 합니다, 한 문장

완성하는 데 이십삼 주가 걸린 유서를 가슴에 품고 사는데도 겨울이 되니 양말이 아쉬워

보온력이 특출난 양말이라고 거짓말하는 상인의 말을 믿고 기어이 새 양말을 사고 마는,

이 허술함이여

이 애잔함이여

    

선생님 초연하게 제 앞에서 피를 토하세요 그럼 나는 당신이 토한 피를 받아마시겠습니다

제 앞에서 장엄한 격노의 페이지를 몸소 쓰시다가 수천 마리의 나비를 토해버리시는 상상

그럼 저는 그 수천 마리 나비를 전부 표본을 떠 당신의 서재에 장식해두겠습니다

잔인한 인간이라고 하실 겁니까

참못난 인간이라고 하실 겁니까

    

선생님 겨울이니 광주리를 꺼냅시다

심장을 게워내고 싶은 욕구는 잠시 참고 빈 광주리 가득 귤을 채웁시다

빈약하게 채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

채운다는 것은 기어코 가득 채우겠다는 것

기어코 가득 채워진 귤 광주리 허허롭게 빌 때까지 손끝이 노랗게 짓무를 때까지

둘이서 겨울을 낳읍시다

그리고 봄에

구슬픈 봄에

     

당신이 겸허히 계획한 그 일을

허락할 수 없는 비탄의 봄에 품에 넣어둔

유서를 꺼내 볕 좋은 데서 말리고

붉게 터진 뒤꿈치에 살살 약을 바릅시다







*심보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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