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학년 아이들이 머그컵 만들기 체험 학습을 하러 가는 날이다. 산 옆 작은 길을 따라 체험마을에 도착했다.
먼저 할 일은 하얀 종이에 색연필로 그림을 그리는 일이다. 이름이나 글씨는 신경 써야 한다. 그림의 왼쪽과 오른쪽이 바뀌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다가는 글자가 외국어처럼 찍혀 나오기 때문이다.
처음 그림을 그리기 시작할 때는 온 정성을 다 해서 그리다기 중간 쯤 지나자 대부분의 아이들이 얼렁뚱땅 완성한다. 컵 굽는 기구에 자신의 컵을 빨리 넣고 결과를 보고 싶은 이유에서다. 시작은 창대했으나 끝은 미미한 그림들이 탄생했다. 완성된 그림을 컵에 붙이면 할 일은 끝이 난다.
방 한 편에 마련된 컵 굽는 기구 앞에는 이미 많은 컵들이 줄 서 있다. 명절 날 뻥튀기 가게 바닥에 뻥튀기를 기다리는 통들처럼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다. 체험 선생님이 심혈을 기울여 구은 컵이 나오기 시작한다.
이 때부터 아이들의 환호성도 시작된다. 작품이 대단하든 대단하지 않든 컵이 나올 때마다 '와' 하며 감탄한다. 친구의 컵을 한 번 힐끗 쳐다보는 것으로 보아 그저 형식적으로 칭찬해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관심은 오로지 자신의 컵이 기구에 얼마나 가까이 다가가고 있느냐에 있다.
자신의 컵이 구워지면 제 자리로 들고 간다. 책상 위에다 놓고 바라보기도 하고 양 손으로 이리 저리 돌려가며 한참을 감상한다. 고개를 갸웃거리고 혼잣말을 하기도 하며 자신의 창작품에 기꺼이 찬사를 보내는 것이다.
6.25 난리는 난리도 아닌 것 같은 체험 시간이 끝났다. 아이들은 담임 선생님 뒤를 따라 학교로 향한다.
승민이가 친구들 무리에서 4~5미터쯤 떨어져 고개를 푹 숙이고 걷고 있다. 컵이 들어 있는 푸른색 비닐 봉지가 무거운지 오른 팔이 축 처져 있다.
“승민아 왜 그래?”
“······.”
“무슨 일 있어?”
“······.”
승민이가 입을 열었다.
“있잖아요. 제가 혹등 고래를 아주 좋아해서 고래를 그렸는데 문제가 생겼어요."
"무슨 문제인데?"
"혹등 고래가 바다 밑바닥에 있어서 숨을 못 쉬어요.”
문제는 바로 혹등 고래였다. 컵에 그림을 붙일 때 위 아래를 바꾸어 붙인 것이다. 파도 위에 얼굴을 내밀고 헤엄치던 혹등 고래가 그림이 뒤집어지는 바람에 바다 밑 바닥에 깔려 버린 것이다.
“아이고! 그래서 속상했구나.”
“······.”
나는 순간적으로 문제 해결 방법을 생각해냈다.
“승민아, 잘 생각해 봐. 네가 컵을 사용하고 나면 씻어서 엎어 놓아야 하잖아?"
"네."
"그러면 혹등 고래가 어떻게 될까?"
“반대로 뒤집어 지죠. 아 맞네. 혹등 고래가 위에 있으니까 숨을 쉴 수 있는 거네요?.”
“바로 그거지. 역시 승민이는 똑똑해. 컵을 사용하는 시간보다 엎어 놓는 시간이 더 많으니까 숨을 쉴 수 있는 시간이 더 많잖아.”
승민이가 한 번 씩 웃더니 한참 앞서 가던 친구들을 향해 뛰어간다.
승민이 앞 머리칼이 찔레꽃 향기 묻은 오월 바람에 흩날린다. 승민이 오른 손에 들린 푸른 봉지가 바람에 사락사락 소리를 낸다. 승민이가 친구들 등 뒤에 대고 소리친다.
"얘들아 빨리 빨리 가자. 와 배고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