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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바로가 Dec 30. 2024

김광균 시인의 “설야”

슬픈 기억의 승화

설야


김광균 시인


어느머언 곳의 그리운 소식이기에

이 한 밤 소리없이 흩날리느뇨


처마 끝에 호롱불 야위어 가며

서글픈 옛 자취인 양 흰 눈이 내려


하이얀 입김 절로 가슴이 메어

마음 허공에 등불을 켜고

내 홀로 밤 깊어 뜰에 내리면


머언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


희미한 눈발

이는어느 잃어진 추억의 조각이기에

싸늘한 추회 이리 가쁘게 설레이뇨


한 줄기 빛도 향기도 없이

호올로 차단한 의상을 하고

흰 눈은 내려 내려서 쌓여

내 슬픔 그 위에 고이 서리다.


  이 시를 맨처음 접한 때는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그 때는 4연의 한 줄 “머언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가  어찌나 야하다고 생각했는지 정작 이 시에 집중할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여인의 옷 벗는 모습은 여고생이었던 우리들의 일상이었을 수도 텐데 왜 야하다고 생각했는지 잘 모르겠다. 그러나 “옷 벗는 소리”라는 시각의 청각화가 무척 무척 신경에 쓰였던 것은 사실이다. 옷 벗는 동작에서 나는 소리라니! 은근하고 약간 성적인 느낌을 의식했다. 아마도 시각의 청각화가 주는 이미지의 공감각화 때문에 아마도 시각과 청각 모두 자극을 받았던 것 같기도 하다. 아마도 이것은 김광균 시인의 역량이자 시인으로서의 끼가 아닌가 생각이 된다. 여자인 내가 읽어도 이 부분은 여전히 묘한 여운을 준다.

  이제 나이가 들어 다른 연들을 살펴보니 눈 내리는 밤의 서정성과 시적 화자의 내면의 슬픔을 느낄 수 있다. “서글픈 옛자취인양“, 마음 허공에 등불을 켜고”, “내 홀로 밤 깊어”, “잃어진 추억의 조각“, “싸늘한 추회”, ”호올로“, ”내 슬픔 그 위에 고이 서리다“라는 시어구들이 사연이 있는 시적 화자의 마음을 느끼게 해준다. 소리 없이 내리는 눈을 매개로 서글픈 기억들이 마음을 밝히어 마음 뒤숭숭한 시적 화자를 눈 을 맞으며 걷게 만들었을 것이다. “내 홀로 밤 깊어”라는 말에서도 자신의 마음 속 추억의 무거움을 느끼게 해준다. 그 추억은 마음을 묵직하게 만드는 추회이나 눈과 함께 나리는 흩어진 추억처럼 잃어진 조각의 존재들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마음을 들뜨게 하여 설레게 마음을 몰아 가슴까지 가쁘게 뛰게 만든다. 그러면서도 예전에는 슬프기만 한 추억도 흰 눈이 내려 쌓여갈 때 한 층씩 쌓여가며 마음 아픔을 내려놓는다.  

  “그리운 소식”으로 시작하는 1연에서 2연은 흰 눈과 함께 천천히 올라오는 추억의 자취에 대해 썼다면 3연은 마음으로 들어와 “마음 허공에 등불을 켜고” “내 홀로 밤 깊어”지면서 추억과 재회하게 됨을 드러낸다. 4연에서 1행으로 공감각화된 섬세함은 마음속 추억이 한거풀 두거풀 벗겨지면서 드러나게 된 적나라한 자신의 마음과도 연결된다. 그럼에도 5연에서 벌거숭이처럼 된 추억속의 자신의 모습이  흉하다기 보다는 그 그리움으로 자신의 가슴이 기쁨에 떨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다행히 고독하고 슬픈 추억은 하얀 눈과 함께 어두운 밤에 정화되면서 시적 화자의 마음도 함께 승화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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