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 이제 매너를 생각할 때(4)
그건 정말 가관이었다. 그녀들은 제멋대로 떠들고 깔깔거렸다. 주위의 사람들은 아예 안중에도 없었다. 아니, 어쩌면 남들이 좀 들어 주기를 바라며 일부러 그렇게 큰소리를 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건 대화가 아니라 악다구니였으며 말이 아니라 소음이었다.
무엇이 그리 재미있는지 손뼉까지 쳐가며 말 그대로 박장대소하는 여자도 있었고, 어떤 이는 발을 동동 구르며 배를 움켜잡기도 하였다.
전철 안에 사람은 많았으나 그 철딱서니 없는 여자들에게 경고를 줄 용기 있는 사람은 없었다. 눈살 찌푸린 얼굴에 경멸의 눈초리로 힐끔힐끔 그녀들을 쳐다보는 이도 있었고, ‘어느 집 여편네들인지 남편 속을 꽤나 썩이겠구나’하고 생각은 할망정 겉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때, 저쪽 어디선가 한 남자의 우렁찬 목소리가 이쪽을 향하여 터져 나왔다.
“야, 이년들아! 조용히 좀 못하겠어!”
욕지거리가 그렇게 ‘씨원스럽게’ 느껴진 적이 없을 정도로 통쾌한 한 마디였다. 일순 전철 안은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고 우리는 이 시대에 아직도 기백이 살아있는 한국 남성을 보기 위하여 일제히 시선을 소리 난 쪽으로 돌렸다.
거기에 우리의 ‘주인공’이 서 있었다. 양손으로 전철의 손잡이를 붙들어 곧 무너질 듯한 몸을 겨우 지탱한 채, 술에 흠뻑 취하여 반쯤 풀어진 눈동자는 그래도 여자들을 노려보면서.
이것이 전철 속의 풍경만은 아니다. 그리고 아줌마의 행태만도 아니다. 남녀불문하고 젊은이들까지 뒤질세라 큰소리로 떠드는 게 요즘 우리네 풍경이다. 식당은 물론이고 비교적 조용하다는 카페에서조차 그렇다. 여기서도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그레샴의 법칙이 작용하는 것 같다. 악다구니 쓰는 사람이 양순한 사람을 구축하니까. 큰소리로 떠드는 사람을 볼 때마다 나는 늘 상상의 나래를 편다. 목소리의 크기에 따라 궁둥이 밑에서 송곳이 솟아오르는 의자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일반적으로 우리들의 목소리가 크다는 것은 국제적으로도 인정된 사실인 것 같다. 프랑스의 사가(史家) 샤르르 달레는 그의 저서 《한국 전추교회사》에서 한국인의 결함으로 너무 큰 소리로 말하는 습관을 지적하고 있을 정도이다. 그의 지적이 아니더라도 대화를 할 때 목소리가 큰 것은 확실히 우리의 특성이요 결함이다.
강연도 연설도 아닌 대화에 있어서 목소리가 크면 우선 호소력이 반감 되다. 사랑을 고백하는 경우를 상상해보자. “난 너를 정말 정말 사랑한다”고 소리친다면 이게 미친놈 아닌가 싶을 것이요, 장난같이 들릴 것이다. 그러나 같은 말이라도 목소리를 낮춰서 말한다면 그 효과는 전혀 다르지 않겠는가.
또한 목소리를 높여 말하게 되면 그만큼 품위가 반감되고 결정적으로 교양 없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심어 주게 된다. 그 말의 내용과는 관계없이 말이다. 생각 없이 떠드는 사람이나 악을 쓰지 세련되고 교양 있는 사람은 결코 큰소리로 말하지 않는다. 이건 매너 이전의 문제다.
우리 속담에 “목소리 큰 사람치고 나쁜 사람이 없다”고 했지만 목소리가 큰 것은 결코 매력적이지 못하다. 나쁜 사람은 아닐지 몰라도 나뿐인 사람은 맞다. 자기만 생각하니까. 더구나 꼰대도 아닌 젊은이가 큰 목소리로 말한다면 그건 정말이지 문제다.
대화할 때 목소리가 좋고 나쁘고는 문제가 안 된다. 당신의 친구 중에 목소리가 나빠서 문제되는 사람이 몇이나 있던가. 그러나 큰소리로 말하는 것은 품격을 해치고 이미지를 망치며 남에게 피해까지 주기에 문제가 된다.
아무쪼록 목소리를 낮춰라. 대중들이 함께 어울리는 장소에서는 더욱 그렇다. 젊은 열기는 목소리의 크기로 푸는 게 아니다. 청소년 시절에 눈치코치 없이 떠들었다면 이제는 눈치코치 있게 말해야 한다. 그것이 성숙이다.
매너란 남의 눈치를 보는 것이다. 고상하게 표현한다면 남을 의식하는 것이요 배려하는 것이다. 그것을 통하여 자신의 품격을 높이는 것이다. 그걸 안다면 어떤 목소리로 말해야 할지 답이 나온다. 목소리의 품격 역시 젊은 날부터 관리하는 게 좋다. 이제 스물쯤 됐으면 자기가 어떻게 말하는지, 목소리의 크기는 어떤지 점검해볼 때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