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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간장계란밥

by 힐링서재 Feb 25. 2025

 어린 시절 간장계란밥을 참 좋아했다. 호랑이 힘이 솟는다는 달콤한 시리얼이나 바삭하게 구운 토스트보다 고소하고 짭조름한 간장계란밥이 더 좋았다. 한 달 내내 먹어도 물리지 않았다. 쓱쓱 비벼 한 그릇 뚝딱 먹고 학교에 가면 든든하고 기분 좋은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다.


 아침이면 엄마가 달군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달걀을 '탁' 깨서 넣는다. 달걀이 '지글지글 칙칙' 익어가는 소리가 들리면 잠결에도 입안에 군침이 돌기 시작한다. 재료는 매우 심플하다. 내 취향을 100% 반영한 계란프라이와 진간장, 참기름만 있으면 충분하다. 여유가 있어 깨소금이나 김가루를 추가하면 조금 더 완성도 있는 간장계란밥을 만들 수 있다.


 여기서 내 취향의 계란프라이란 노른자는 살아있되, 흰자는 완벽하게 익은 상태를 말한다. 노른자 주변의 두툼한 흰자를 잘 익히는 게 관건이다. 잘못하다 노른자가 터지면 낭패다. 나름 고도의 기술을 필요로 하는 섬세한 작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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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학교 무렵부터 직접 간장계란밥을 만들기 시작했다. 한두 가지의 재료를 추가해 나만의 업그레이드 간장계란밥을 만들었다. 참기름 대신 버터를 넣거나 쪽파를 다져 넣는 식이었다. 가끔은 노란 슬라이스 치즈를 넣어 느끼함을 극대화해서 먹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꽤 오래 사랑받았던 레시피는 청양고추를 잔뜩 다져 넣은 간장계란밥이었다. 칼칼하게 매운 고추가 입안을 깔끔하게 정리하는 느낌이랄까.


 한국 사람치고 간장계란밥을 싫어하는 사람을 못 봤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네 어머니들 입장에서도 이처럼 간단하게 만들 수 있는 한 끼가 없는 것이다. 한국인은 밥심으로 산다는 말이 있듯이 똑같은 탄수화물이라도 빵이나 시리얼과는 비교할 수 없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어릴 때부터 즐겨 먹던 추억의 음식이 된 것이다.

 그런 연유로 내 아이가 이유기를 끝내고 밥을 먹기 시작했을 때, 나도 간장계란밥을 자주 만들었다. 그때 즈음 간장계란밥 전용 ‘계란 간장’이 유행하기 시작하면서 애 키우는 집 치고 ‘계란 간장’이 없는 집이 없었다. 진간장보다 부드럽고, 달콤한 맛이 가미된 일본식 계란 간장은 나의 필수템이 되었다. 물론 지금은 옛 맛을 잊지 못하고 진간장으로 다시 돌아왔지만 말이다.


 나처럼 내 아이도 간장계란밥을 좋아했다. 아이가 먹는 음식이다 보니 어느 순간 탄수화물과 단백질 딱 두 가지로 이루어진 간장계란밥의 영양학적 균형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고심한 끝에 볶은 양파를 추가하기로 했다.


 달군 프라이팬에 채 썬 양파를 넣고 중 약불에서 갈색이 될 때까지 볶는다. 이 과정을 카라멜라이징이라고 하는데 갈색으로 잘 볶은 양파는 단맛과 풍미가 극대화된다. 평소 양파를 싫어하는 아이도 부담 없이 먹을 수 있다. 카레를 만들 때도 카라멜라이징 된 양파를 듬뿍 넣어보자. 한 층 깊어진 맛에 깜짝 놀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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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흔한 간장계란밥에 볶은 양파를 넣었을 뿐인데, 아이는 엄지 척을 내세우며 맛있다고 탄성을 내뱉었다. 맛도 있고 영양학적으로도 조금 더 우수해졌으니 날이면 날마다 열심히 양파를 볶았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 아이도 예전의 나처럼 본인만의 레시피를 탄생시키기에 이르렀으니, 나는 그것을 21세기 간장계란밥으로 부르려 한다. -별 의미는 없다.


 별다를 것 없는 아침, 그날도 나는 아이가 등교하기 전에 열심히 양파를 볶아 간장계란밥을 만들었다. 맛있다고 해서 주야장천 아침 식사로 내놓았더니 어느새 물렸나 보다.    

 ‘어떻게 간장계란밥이 질릴 수 있지?’

 어쨌든 그날 아침 우리 아이는 내가 만든 양파간장계란밥에 본인만의 ‘킥’을 추가하고야 말았다.


 그것은 바로 전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은  불닭볶음면의 화끈하게 매운맛, ‘불닭 소스’였다. 유달리 매운 걸 잘 먹는 아이의 요청으로 한 병 사두긴 했으나, 이렇게 쓰일 줄이야. 아침부터 그 매운 걸 먹냐고 타박했지만, 한 입 먹어보니 웬걸! 간장계란밥과 불닭 소스는 그야말로 환상의 궁합이었다.


 아이는 좋아했지만, 사실 나도 좋아했지만 불닭 소스의 아찔하게 매운맛이 걱정되었다. 하지만 원래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고 먹지 말라면 더 먹고 싶어지는 법이다. 그래서 그 뒤로도 한참을 양파를 볶았고 아이는 불닭소스를 넣은 간장계란밥을 맛있게 먹었다.


 그리고 지금은 아이도 나도 다시 기본에 충실한 오리지널 간장계란밥으로 돌아왔다.



 

 그러고 보면 뭐든 ‘때‘가 있나 보다.

 한 때는 맛있었던 계란 간장과 볶은 양파와 불닭 소스를 돌고 돌아 다시 제 자리를 찾은 간장계란밥처럼.

 마지막 종착지가 어디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다양한 시도와 많은 경험을 하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알 수 있다. 아니, 어쩌면 애초에 종착지란 없는 걸지도 모른다. 그냥 ‘한 때‘가 있을 뿐. 매 순간 최선을 다해 즐길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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