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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주 Aug 17. 2023

#11. 돈돈돈

더 길어지게, 더 길어지게

 생각해 보면 제일 처음 노동으로 돈을 벌었던 건 19살 수능을 본 해의 겨울이었다. 혜화에 있었던 고급진 훠궈집이었다. 그곳에서 일하면서 나는 생각보다 내가 일머리가 좋다는 것을 깨달았다. 공부만 하던 10대의 마지막 시기에 공부가 아닌 다른 곳에 온 힘을 쓸 수 있다는 것이 즐거웠다. 그 이후로 대학을 거쳐 제대 후 지금까지 알바를 쉬어본 적이 없다. 하지만 한 곳에 오래 묶여있는 것을 잘 버티지 못하는 나는 곧잘 일하다가도 울덕증에 갑자기 그만둬버리고 종종 어딘가로 떠나던가 숨던가 했다. 그렇지만 통장의 바닥을 보는 것 또한 잘 버티지 못하던 나는 다시 새로운 일을 구하곤 했다. 보드샵, 극장, 백화점, 카페, 음식점, 설거지, 물류센터 등등 노동력을 제공하면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일들을 하면서 살아왔다.


 하루살이처럼 사는 것에 대한 회의감이 밀물처럼 들어오던 요즘, 왜 이렇게 돈돈거리냐는 H의 말에 잠시 정신이 멍해졌다. 우리는 오래간만에 카페에서 빵을 먹으며 미래에 대한 얘기를 나누던 차였다. 무심코 던져진 말은 내 인생을 흔들기에 충분했다. 첫 노동을 시작했던 19살 때부터 지금까지, 파도 치듯 위태로운 삶을 견디게 해 주었던 건 단 하나, 내가 살아가면서 돈은 좇지 않으리라 하는 신념이었다. 자아의 실현이라든지, 예술이라든지, 돈보다 중요한 무언가를  쫓고 있다는 이유 없는 자부심이 나의 삶을 지탱해주고 있었다.


 그러나 매달 빠져나가는 월세와 구멍 난 다라에 물이 새듯 새는 생활비를 언젠가부터 하나하나 계산하고 따지고 있는 내 모습이, 친구가 보기엔 돈돈거리는 것으로 보였나 보다.

 ‘난 그런 사람이 아니야!‘

 마음속 깊은 곳에서 강한 부정이 울컥하고 올라왔지만 나는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나도 내가 언젠가부터 돈돈돈거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돈은 문제다. 원하는 것을 하기 위해선 늘 나 스스로에게 투자를 해야 했고 그러려면 늘 돈이 필요했다. 작년부터 자취를 시작하면서 그런 마음들이 더 크게 자리 잡고 있음을, 무심코 던진 친구의 말 때문에 깨달았다.

자취하면서 돈 모으는거, 진정 가능한 일인가

 나의 목표는 돈이 아니야. 내가 추구하는 것은 인격적으로든 자아실현적으로든 좀 더 높은 곳에 도달하는 거야. 돈은 단순히 도구에 불과해. 그렇게 순수하게 생각한 나는 늘 돈이 들어오는 족족 나의 투자를 위해 사용했다. 더 배우고 더 연습하고 더 나아지기 위한 투자를 했다. 그렇게 살아오다 보니 서른 살의 나에게 남은 것은 나라는 몸뚱이와 수많은 시도들 뿐인 나의 습작들 뿐이었다. 서른 먹고 모아둔 돈도, 제대로 만들어놓은 작품도 없는 나는 대체 무엇일까 하고 생각하면 한없이 아득해진다.

인상 깊었던 ‘마우리치오 카텔란’의 전시

 어쩔 수 없다는 말과 누구나 그렇다는 말은 내가 제일 싫어하는 말이다. 어쩔 수 없다는 말은 자기합리화하는 말 같고, 누구나 그렇다는 말로 위로하거나 위로되는 것은 포기하고 지는거 같으니까. 언젠가부터 지기 싫어서 딱딱하게 버티는 게 일상이 되어버렸다. 딱딱하면 부러지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흐물흐물 구렁이 담 넘어가듯 살고 싶지는 않아. 물처럼 바람처럼 부드러우면서도 꼿꼿하게 살아갈 수는 없을까.


 며칠 전부터 집 앞에 산책 나갈 때조차 고개를 높이 들기를 연습하고 있다. 늘 흐트러지고 힘 빠지게 걷는 게 습관이 되어있는 나를 발견하고 고쳐야겠다 싶어서 시작한 것이다. 무용시간에 배운 자세를 떠올린다. 11자 걸음으로 아랫배와 괄약근에 힘을 주고 머리끝에는 실을 달아둔 것처럼 위로 더 위로 길어지는 바른 자세. 그렇게 가슴뼈를 들고 경추를 세우면 시선도 자연스레 위로 올라간다. 비록 난 돈도 없고 가진 것은 습작뿐인 행인 1이지만, 나는 나를 가졌다. 지금의 나를 가진 것이 나의 가장 큰 재산이고 나의 자랑이다. 더 바르게 자세를 고쳐 잡자. 몸의 모든 부분들을 늘리며 길어지게, 더 길어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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