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도 인정한 남계서원, 그런데 현판이 두 개라고?
조선 초기의 성리학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 중 하나가 있습니다.
바로 일두 정여창 입니다. 고려 최초의 성리학자 안향 그리고 고려 마지막 충신 정몽주의 학맥을 잇고, 조선 성리학을 발전시킨 학자로 평가받습니다. 하지만 그의 삶은 평탄하지 않았습니다. 연산군의 노여움을 사 유배지에서 생을 마감해야 했고, 심지어 사후에도 갑자사화 때 부관참시를 당하는 비극을 겪었죠. 다행히 중종반정 이후 명예를 회복했고, 마침내 문묘에 배향되는 영예를 안았습니다.
그의 학문적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곳이 바로 남계서원(南溪書院)입니다.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지어진 서원이자, 이후 조선의 서원의 기준을 확립한 중요한 역사적 장소입니다.
정여창이 생전에 거주했던 집이 바로 일두고택 입니다. 그의 호인 일두 에서 따온 이름이죠. 영화와 드라마 촬영지로도 종종 등장합니다. 최근 인기 드라마 옥씨부인전의 한 장소로 등장한 곳입니다.
일두고택을 둘러보고 이곳에서 차를 타고 10분 남짓 달리면 남계서원이 나옵니다. 서원은 전통적으로 학문을 연구하고 후학을 양성하는 곳이지만, 동시에 유학자들의 정신을 기리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남계서원이 더욱 특별한 이유는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서원 중 하나라는 점입니다. 1868년, 대원군은 전국의 서원을 대대적으로 정리했지만, 유교 학문의 중심지였던 남계서원은 그 가치를 인정받아 존속되었습니다.
남계서원은 1552년, 조선 명종 때 세워진 이곳은 이후 조선 전역에 세워질 수많은 서원들의 배치 기준을 확립한 곳입니다.
"전학후묘(前學後廟)" – 즉, 앞쪽에는 학문을 배우는 공간이 있고, 뒤쪽에는 제사를 지내는 공간이 위치하는 배치 방식을 처음으로 도입했습니다.
이후 전국적으로 세워진 서원들은 이 배치 방식을 따랐고, 남계서원은 조선 서원의 전형적인 모델이 되었습니다.
남계서원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두 개로 나뉜 현판입니다.
보통 서원의 현판은 하나인데, 이곳은 특이하게도 "남계(南溪)"와 "서원(書院)"이 따로 적혀 있습니다.
또한 건물 곳곳에는 세월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낡아 벗겨진 글자들, 흐려진 색감이 이곳이 지닌 오랜 역사를 짐작하게 합니다.
남계서원은 201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조선 시대 성리학 교육과 서원 문화의 대표적인 사례이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오래된 건축물이 아니라, 조선 시대 교육의 중심이었고, 학문의 전통을 이어가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가치가 인정된 것이죠.
남계서원은 관광객이 북적이는 곳이 아닙니다. 오히려 한적한 분위기 속에서 조선 시대 학자들의 흔적을 천천히 따라가볼 수 있는 곳입니다.
바람이 건물 사이를 지나가고, 나무와 기와가 어우러진 모습은 한 폭의 그림처럼 다가옵니다. 이곳에서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수백 년 전 이곳에서 공부하던 선비들의 마음을 떠올려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