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우크라이나의 역사와 한반도의 역사는 공통점이 많다고 생각한다. 지정학적으로 열강들 사이에 위치해있으며 숱한 외세의 침략을 받았고 그런 와중에도 자신들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는 점이 가장 와닿는다. 오늘은 우리와 닮아있는 우크라이나의 과거의 빛났던 역사, 고통받았던 역사와 앞으로 그들에게 찾아올 미래를 생각하며 글을 써보았다.
키이우의 랜드마크 '조국의 어머니 동상'
나는 우선 키이우의 조국의 어머니상과 그 아래에 위치하고 있는 키이우 전쟁사 박물관에 찾아가 보았다. 키이우는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치 독일과 전투를 치렀는데 전쟁 초기 독일군의 압도적인 화력과 전술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키이우 방어병력과 주민들이 끝까지 저항하였으나 독일군의 포위망을 이겨낼 수는 없었고 수십만의 병사가 희생되고 포로로 잡히고 말았다. 히틀러는 키이우 함락을 아주 기뻐했는데 이 승리를 바탕으로 소련을 곧 굴복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자만하였다. 키이우 시민들은 나치 치하에서 온갖 고초를 당하다 1943년 소련군의 대대적인 반격으로 나치 독일군을 격퇴시키고 해방된다. 시민들에게 나치 독일을 격퇴한 항전 그리고 베를린을 함락하고 전쟁에서 최종으로 승리했다는 소식은 그들에게 엄청난 자부심이었다. 소련 정부에서는 그들의 노고를 치하한다는 의미에서 키이우에게 '영웅 도시'의 칭호를 내려주었다. 이후에는 2차 세계대전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서 '조국의 어머니 동상'을 세웠다. 동상의 높이 62m 하부 구조물까지 치면 100m가 넘는 엄청난 크기의 동상인데 가까이에서 보면 위압감이 장난이 아니었다. 여신상의 방패에는 소련의 국장이 새겨져 있는데 나중에 우크라이나 국장이나 다른 문양으로 대체될 수도 있다고 한다.
강변에 자리한 작은 마을 같은 페체르스키 동굴 수도원
키이우 전쟁 박물관에서 조금 걸어가면 페체르스키 동굴 수도원에 갈 수 있다. 솔직히 걷기에는 조금 멀 수도 있고 버스 타기에는 꽤 가까운 애매한 거리다. 페체르스크 수도원은 동유럽 최초의 국가였던 키예프 공국의 유산들 중 하나이다. 키이우 드네프르강 절벽 언덕 위에 위치한 작은 마을과도 같은 수도원이다. 이곳은 1051년 동굴에서 수도 생활을 하던 두 명의 수도사가 동굴 위에 사원을 지은 데서 기원했다. 당시 사회문화적으로 절정기를 맞았던 키예프 공국을 상징하는 건물이다. 2차 대전 중 폭격으로 파괴되었다가 우크라이나의 독립 이후 복원되었다. 지하 동굴로 내려가면 이곳에서 수도생활을 하다가 삶을 마감한 수도사들의 무덤이 있다. 내부는 촬영이 금지되어 있다.
키예프 공국의 중심 교회 '성 소피아 대성당'
다음으로 간 곳은 성 소피아 대성당이다. 뭔가 페체르스키 수도원과 비슷하게 생긴 건물이지만 약간 다르다. 페체르스키 수도원은 강변 절벽을 따라 지어진 수도원이라면 소피아 성당은 넓은 광장에 지어진 성당이다. 이 성당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페체르스키 수도원과 함께 우크라이나 키이우 하면 빼놓을 수 없는 문화유적이다. 이 건물도 키예프 공국 시절에 건축되었는데 키예프 공국의 전성기를 상징하는 건축 물 중 하나다. 앞서 소개된 안드레이 교회와 함께 공산주의 소련 시절에는 탄압을 받았는데 교회가 폐쇄되고 무신론 박물관 개조당하는 아픔을 겪었다. 1993년 우크라이나 독립 이후 잃어버렸던 이름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들의 생활 속에 오랫동안 자리 잡은 절대자에 대한 마음은 그 누구도 꺾을 수 없었던 것이었다.
카자크 지도자 보흐단 흐멜니츠키 동상
소피아 성당 앞 광장에는 우크라이나 카자크 지도자 보흐단 흐멜니츠키의 동상이 있다. 보흐단 흐멜니츠키는 우크라이나 카자크족의 수장으로 17세기쯤 폴란드 치하의 우크라이나를 해방시켜서 지금의 우크라이나의 영역을 확립한 인물이다. 우크라이나 사람들 대부분 보흐단을 존경하지만 전쟁으로 인해 반러 감정이 심해진 지금 이 사람에 대한 평가가 마냥 후하지많은 않다. 왜냐하면 보흐단이 우크라이나를 해방시키면서 러시아 군대의 지원을 받았는데 이를 빌미로 지금까지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에 경제 문화적으로 의존하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시각이 있다. 우크라이나를 해방시킨 위인이 지금은 러시아와 손을 잡고 우크라이나를 러시아에 종속되게 한 반역자로 보는 의견도 생겨난 것이다. 이런 사례를 보니 나는 문득 영국의 역사가 '에드워드 카'가 말했던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말이 새삼 와닿았다.
키예프 공국의 전성기를 상징하는 '황금의 문'
키이우 '황금의 문'이다. 이것은 키예프 공국의 전성기 1307년 현자 야로슬라프 대공이 만들었다. 황금의 문 앞에 세워진 동상이 바로 키예프 공국의 성군 야로슬라프 대공이다. 야로슬라프는 슬라브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로 그의 업적을 나열하자면 어마어마하다. 영토확장, 기독교 문화 발전 그리고 슬라브 최초의 법전 '루스카야 프라브다' 편찬이 있다. 문무를 겸비한 위대한 왕으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서 모두 존경받는 인물이다. 키예프 공국은 한때 모스크바를 한낱 변방의 시골로 거느리기도 한 아주 강성한 국가였다. 이 문은 높이만 12미터 인터 크기만 봐도 그 당시의 키예프 공국의 위세가 짐작된다. 현재의 문은 1830년대 흙속에 남은 성문의 일부를 발굴하고 복원해 놓은 것이다.
키이우의 중심 독립광장 마이단
우크라이나 독립광장 우크라이나어로 마이단이라고 부른다. 한국으로 치면 광화문 광장 같은 곳이다. 키이우를 대표하는 중심가이자 중요한 행사 때마다 많은 사람들이 모인다. 마이단의 중심에는 우크라이나 독립 기념탑이 있는데 러시아로부터 독립한 10주년을 기념해 2001년에 세운 우크라이나 독립 기념탑이다. 탑 꼭대기 여신상의 무게만 20톤이 넘는다고 한다.
광장 한쪽엔 우크라이나 건국 신화에 나오는 키이우 시조상이 있다. 키이, 쉐크, 하리브 3형제 그리고 여동생 르이베지 이다. 이들이 처음으로 키이우에 도시를 만들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내가 우크라이나에 방문했던 2018년에 마이단 광장에서 유로 마이단 사건에 대한 추모 행사를 하고 있었다.
과거 우크라이나에서는 큰 시위가 2차례 있었다. 2004년 대통령 부정선거에 맞서서 민중들이 봉기한 오렌지 혁명, 그리고 2013년 대통령의 친러 정책에 반발한 반러 시위대와 친러 시위대의 격돌로 일어난 유로마이단 사건이 있다. 당시 국민의 뜻에 반하던 대통령인 야누코비치를 축출하고 혁명이 성공으로 끝나나 싶었지만 러시아의 크림반도 강제합병, 동부 돈바스 전쟁 등으로 당시에도 큰 혼란을 겪고 있었다. 당시에도 빨리 이런 갈등이 끝나고 평화가 오기를 기원했지만 나의 바람과는 정 반대로 흘러가 버리고 말았다. 2022년 2월에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대대적으로 침공해오며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고 있다. 많은 전문가들은 러시아의 압도적인 군사력에 우크라이나가 얼마 버티지 못하고 무너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나라를 지키겠다는 의지는 꺾을 수 없었고 이에 러시아는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자신의 삶을 지키고 열심히 살아가는 우크라이나 국민들. 긴 새벽의 어둠을 지나 아침이 밝아오듯 그들의 앞날에도 빛이 찾아오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