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형탈모에 레이몬드 카버의 『대성당』을 처방합니다
1. “굳이 써야 할까요?”
지난 가을, 나는 정군(닉네임)을 만나러 광화문으로 갔다. 그와 이야기를 마치고, 우리는 평양냉면을 먹었다. 평양냉면의 슴슴한 맛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던 나는, 정군이 가자고 한 식당에서 사람들이 왜 평양냉면을 좋아하는지 알게 되었다. 슴슴한 맛 특유의 감칠맛 같은 게 혀끝에서 느껴졌다. 그와 다음 약속을 잡고, 나는 걸어서 덕수궁으로 갔다. 하늘은 파랗고, 은행잎은 노랗고, 바람은 선선하고, 걷기에 좋은 가을날이었다. 덕수궁의 석조전과 돌담을 거닐며, 나는 계속 같은 생각을 했다. “굳이 써야 할까요?”라는 정군의 말을. 내가 정군을 만나러 오며 듣고 싶은 말은 “글이 잘 안써져요. 어떻게 할까요?”였다. 사십대 초반의 애아빠인 정군이 소설을 쓰고 싶어한다는 얘기를 지인들로부터 들었고, 나는 사십대에도 소설쓰기를 고민하는 사람을 만나보고 싶었다. 문학전공자인 내 주변에 이제 소설쓰기를 걱정하는 사람은 없다. 이십대 때, 내 주변에는 시와 소설이 안 써진다고 오만상을 찌푸리고 다니는 친구들이 대부분이었다. 이제 이들은 대부분 착실한 직장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교사, 공무원, 출판사 편집자 등 제 밥벌이는 하는 사람들로 살아가고 있다. 나도 여기에 포함된다. 소설쓰기를 포기한 인간의 부류에. 그래서 나는 정군을 만나보고 싶었다. 이십대가 아니라 사십대에도 소설을 쓰고 싶어 하는 사람의 애로사항은 무엇인지 들어보고 싶었다. 아이를 키우며 소설을 쓰는 일은 어떤 시너지효과를 가져오게 되는지도 궁금했다.
그런데 정군은 가뿐하게 말했다. “굳이 써야 할까요?”
그래서 오히려 내게 질문이 생겼다. “왜 정군은 쓰려 하지 않을까?” 더 나아가 “정군이 글을 쓰면 좋겠어!”라는 바람까지. 생각해보면 어처구니없는 욕망이다. 왜 나는 정군이 글을 썼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내가 뭐라고. 내 글도 못써서 허겁지겁 살면서 무슨 오지랖인가? 혹은 글이 대수인가? 글이 뭐라고 나는 정군이 글을 썼으면 좋겠다고 기대하는 것일까? 덕수궁 돌담길을 돌고 돌며 생각해보니, 내 욕망이 잘 설명되지 않았다.
2. 정군의 예민함와 단호함
정군은 원형탈모증을 두 번 앓았다고 했다. 처음은 예전에 다니던 출판사의 일이 폭주할 때였다(현재 정군은 딸의 주양육자이며, 때때로 아내가 운영하는 출판사 일을 하고 있다). 출판사에서는 인문SNS와 동영상강의서비스를 결합한 신사업을 런칭할 때였는데, 함께 일할 사람이 안 구해져서 업무량은 치솟고 스트레스 받을 일이 많았다. 그때 원형탈모증이 왔다. 오랜 동안 한의원에서 침을 맞고 한약을 먹어 치료할 수 있었다. 두 번째 원형탈모증은 지금 네 살인 딸이 태어났던 육아 초기라고 한다. 정군은 스스로를 너무 예민한 사람이라고 평가한다. 질서정연한 생활패턴과 라이프스타일이 깨지게 되었을 때, 그의 온몸의 감각들은 난리가 났다. 그런데 ‘아이’는 이런 부모의 입장을 고려해주는 존재가 아니다. 잠을 자고 밥을 먹는 일조차 제 때 할 수 없는 ‘초보 아빠’ 시절 그에게 다시 원형탈모증이 왔다. 이때는 한의원에 다니며 장기적으로 치료할 형편도 되지 못해, 종합병원에 가서 스테로이드제를 치료받았다.
늘 잠이 부족하고 신경이 곤두서게 했던 갓난쟁이 딸도 이제 네 살이 되어 어린이집에 다니게 되었다. 정군의 아내가 운영하는 출판사도 스테디셀러를 몇 종 갖고 있어 비교적 안정적으로 굴러간다. 시간과 돈에 있어, 정군에게는 어느 정도 여유가 생겼다. 또 정군은 예민한 사람답게 만년필, 레코드 등 많은 취미를 섭렵해왔는데, 가장 오래 지속된 것은 ‘책읽기’였다고 토로했다. 정군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내 두뇌회로는 계속 “정군은 글을 써야 해!” 라는 정해진 답을 맴돌고 있었다.
책읽기를 오래 해온 사람답게 정군은 박학다식하다. 스스로 커리큘럼을 짜서 공부계획을 세우고, 생각의 리듬이나 감정의 기복에 따라 책을 바꿔가며 읽는 신공을 발휘하기도 한다. 그는 달변가이다. 그와 친한 사람들은 그가 얼마나 말을 잘하고 좋아하는지 안다. 말로 싸워온 사람의 내공으로 그의 말에는 어떤 ‘단호함’이 있다. “굳이 써야 할까요?”라는 그의 말이 나에게 ‘벽’처럼 느껴졌던 건 이런 단호함과 완고함 때문이었다. 그와 두 번째 만났을 때, 우리는 중식당의 원형 테이블에서 세트메뉴를 먹었다. 작은 접시에 담아 나오는 죽순샐러드, 청경채볶음, 게살스프 같은 음식을 먹으며, 나는 어떻게 그에게 말로 ‘잽’을 날릴 것인가 머릿속으로 계산해봤지만 빈틈이 보이지 않았다.
“정군에겐 명확하지 않은 책을 골라줘야 해. 그림책 같은 거! 그래야 다르게 생각해보지.”
나와 정군의 식사에 합석했던 청량리(닉네임)의 말이다. 자기 생각이 뚜렷한 정군에게 틈을 만들려면 독해하기 힘든, ‘명료하지 않은’ 책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그때 퍼뜩 들었다. 확실히 청량리는 나보다 정군을 잘 아는 ‘절친’이었다. 이러한 착상뿐 뚜렷한 성과 없이 두 번째 만남을 마치며 내 입에서 나온 소리는 고작 이거였다. “다음엔 뭘 먹을까?”
3. 무심하게 애틋한
그러나 정군와의 세 번째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후 나에게 갑자기 급한 일이 떨어져 그걸 처리하느라 눈 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두 달의 시간이 흘러갔다. 회의를 하고, 일정을 점검하고, 협력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빠짐없이 연락을 하고, 매일 ‘카톡’으로 업무를 처리하느라, 나는 정군의 글쓰기를 생각할 짬이 없었다. 처음 두 주 정도는 새로운 일이 가져다주는 활력과 긴장으로 약간 들뜬 상태였다. 그러나 그 후 활력은 사라졌고, 긴장은 피로가 되었다. ‘언제 끝나나?’와 ‘별 문제 없이 끝나야 한다!’는 두 가지 생각만 내 머릿속을 채우고 있었다. 그리고 빈 공간이 있다면 ‘쉬고 싶다!’는 느낌 정도.
그는 불을 피우지만, 그때 또 일이 생기기 시작한다. 나뭇가지 위에 쌓여 있던 눈이 그 위로 떨어진다. 불은 꺼진다. 그러는 동안 날은 더욱 추워진다. 밤이 다가오고 있다.
나는 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낸다. 아내에게 먼저 걸어볼 작정이다. 만약 전화를 받는다면 해피 뉴이어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그게 전부다. 일을 만들고 싶지는 않다.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을 것이다. 그녀가 먼저 시작한다고 하더라도. 그녀는 내가 어디에서 전화를 거는지 물어볼 테고 나는 말해야만 할 것이다. 새해의 결심들에 대해서는 한마디로 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농담할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다. 그녀와 통화한 뒤, 나는 여자친구에게 전화를 걸 것이다. 어쩌면 그녀에게 먼저 전화할지도 모르겠다. 나로서는 그녀의 아들이 전화를 받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여보세요, 자기야?” 그녀가 전화를 받으면 그렇게 말하리라. “나야.” (「내가 전화를 거는 곳」, 『대성당』, 문학동네, 2007년, 200~201쪽)
급하게 처리해야 하는 일이 마무리될 즈음, 나는 정군이 좋아한다는 레이몬드 카버의 소설책을 읽기 시작했다(레이몬드 카버뿐 아니라 정군은 나에게 여러 권의 책을 추천해줬다!! 그러니까 이번 편은 정군의 셀프 문학처방전이다^^) 일은 끝나면 다시 공부든 일이든 예전의 루틴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아 뭐든 손에 잡히지 않았다. 마음이 어수선해 읽기 시작한 소설책인데, 어느 순간 나는 건조하고 간결한 문장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나는 빠르게 소설 속 인물들에게로 감정이입 되었다. 그들은 대개 피로하거나 막막한 상태에 놓여 있다. 실업, 이혼, 알코올중독 등 인생의 막다른 길에 놓여 있다. 그들에게 주어진 선택지도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앞에 인용된 「내가 전화를 거는 곳」의 주인공은 그의 인생에서 두 번째로 금주센터에 입소했다. 알코올중독으로 아내와 이혼했고, 이혼 전에 이미 한 번 금주센터에 들어왔었다. 그 후 그는 여자친구와 살림을 합쳤다. 여자친구 또한 형편이 좋지 못하다. 그녀에게는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내는 사춘기의 아들이 있고, 최근에는 자궁경부암 진단을 받았다. 다시 금주 결심을 하고 금주센터에 입소하러 오는 길에도 두 사람은 만취가 되어 음주운전을 했다. 지금 그는 여자친구가 걱정스럽다. 집에 혼자 있는 아들 때문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음주운전을 해서 돌아간 여자친구의 안위가 걱정스럽고, 자궁경부암의 경과도 걱정스럽다. 전화를 걸었을 때 퉁명스런 그녀의 아들이 전화를 받을까 걱정스럽고, 그 아들의 입에서 어머니에 대한 안 좋은 소식을 전해 듣게 될까 두렵다. 그녀에게 안 좋은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이혼과 알코올중독 경력 말고는 뾰족한 수가 없는 그가 그녀에게 줄 수 있는 도움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전화를 걸고 싶다. 그는 새해 인사로 신년의 결심을 이야기할 수 없을 만큼, 신뢰받지 못하는 삶을 살아왔다. 하지만 지금 그녀에게 전화해 안부를 묻고 싶다. 자신에게 주어질 행운을 모두 모아, 그녀의 안녕을 확인하고 싶다. 앞으로 살아갈 날이 막막한, 순탄하지만은 않으리라 예상되는, 이 사람의 안부전화 한 통이 피로한 내 마음에도 위로가 되었다. 인생 별 거 있나? 싶다가도, 그렇게 단정 지으려는 마음을 머뭇거리게 하는 파편들이 레이몬드 카버의 소설 속에는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그날이 그날인 나날을 한 순간에 반짝이게 하는 조각들을 레이몬드 카버는 무심한 듯 쓰윽 꺼내 보여주지만, 그 무심한 듯 애틋한 문장에 나는 자주 ‘울컥’하는 심정이 되었다. 소설 속 인물의 말이나 행동 때문이었지만, 사실은 별 볼일 없는 내 인생을 위로하기 위해서였다. 별 볼일 없지만 그래도 살아봐야지 하는 ‘용기’와, 써놓고 보면 유치해서 바로 지워버리고 싶은 ‘희망’을, 레이몬드 카버는 실업자와 이혼남과 알코올중독자의 입을 빌어 말하고 있다.
4.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나는 왜 정군이 글을 썼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까? 이건 내가 만화를 전공한 작은딸이 돈이 되든 안 되든 계속해서 만화를 그렸으면 하는 마음과도 같다. 딸은 크레파스로 벽에 낙서를 하기 시작한 이후로, 지금까지 줄곧 그리고 있다. 물론 그 그림을 스스로 만족해하지는 않는다. 딸의 시간은 대부분 만화를 그리거나, 만화를 보거나, 만화를 그리는 데 도움이 된다는 명분으로 영화를 보는 일로 채워졌다. 그리고 거기서 쌓인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음악을 들으며 보낸 시간도 꽤 된다. 돈이 되든 안 되든, 만화는 작은딸의 인생을 굴러가게 하는 중심축이다.
계속해서 책을 읽는 정군에게서 나는 그의 ‘글’에 대한 매혹을 느낀다. “굳이 써야 할까?”라는 말 속에 들어있는 그의 ‘높은 기대치’를 읽어낼 수 있다. 그러니까 그의 말은 “좋은 글이 아니라면 굳이 써야 할까?”이다. “좋은 글이 아니라면 쓰고 싶지 않다”는 의지이기도 하고 “좋은 글을 쓰지 못할까 두렵다”라는 조심스러움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는 “읽는 걸로도 충분히 즐겁다!”라고 단념하고 있다. 그런데 정말 충분할까? 정군은 자신의 욕망을 확신할 수 있을까? 나는 정군이 ‘좋은 글’이라는 자신의 기대치를 낮추고, 글을 쓰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 좋은 글이든 안 좋은 글이든, 글을 쓰는 인생과 그렇지 않은 인생은 완전히 다르다. 이건 ‘글’이 특별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달리기선수와 가수의 가는 길이 다르듯이 글을 쓰는 인생과 그렇지 않은 인생은 다르다. 나는 이제 정군이 글을 쓰는 인생의 길을 미루지 말고 갔으며 한다(이런 말은 진심이지만 쓰고 나면 바로 지워버리고 싶다! 조금만 참아보자).
레이몬드 카버의 소설집 『대성당』에서 인물들은 계속해서 무언가를 먹고, TV를 보고, 담배를 피우고, 이야기를 나눈다.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이 사소한 행동과 오고가는 말 속에 그날이 그날 같은 일상을 살아가게 하는 힘이 나온다.
그들은 롤빵을 먹고 커피를 마셨다. 앤은 갑자기 허기를 느꼈는데, 그 롤빵은 따뜻하고 달콤했다. 그녀는 롤빵을 세 개나 먹어 빵집 주인을 기쁘게 했다. 그리고 그가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신경써서 귀를 기울였다. 그들은 지치고 비통했으나, 빵집 주인이 하고 싶어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빵집 주인이 외로움에 대해서, 중년을 지나면서 자신에게 찾아온 의심과 한계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할 때부터 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그들에게 그런 시절을 아이 없이 보내는 일이 어떤 것인지 말했다. 매일 오븐을 가득 채웠다가 다시 비워내는 일을 반복하면서 보내는 일이 어떤 것인지, 그가 만들고 또 만들었던 파티 음식, 축하 케이크들. 손가락이 푹 잠길 만큼의 당의(糖衣). 케이크에 세워두는 작은 신혼부부 인형들. 몇백, 아니, 지금까지 몇천에 달할 것들. 생일들. 그 많은 촛불들이 타오르는 것을 상상해보라.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같은 책, 127쪽)
하루아침에 비극을 맞아 경황이 없는 부부에게 빵집 주인은 자신이 만든 빵을 내준다. 부부가 겪은 고통은 그들이 먹는 빵의 맛도 느끼기 못하게 할 것이다. 부부에게 닥친 재난은 빵집 주인의 빵 굽는 이야기쯤은 귀에 들어오지 않게 할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부는 ‘신경써서’ 빵집 주인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것 말고는 그들 부부가 할 수 있는 일이 지금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부부는 ‘신경써서’ 주의 깊게 빵집 주인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럴 때 들려오는 말이 있지 않을까? 이제껏 보지 못한 것들을 새롭게 보게 되지 않을까? 명확했던 것들이 경계를 허무는 것들이 있지 않을까?
정군과 세 번째 식사를 해봐야겠다. 정군이 요즘 읽고 있는 책들에 대한 감상과 내가 바쁘게 보내는 두 달 동안 정군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들어봐야겠다. 그 사이 정군의 딸이 폐렴으로 응급실에 다녀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이들은 참 부모를 놀래키며 큰다. 물론 우리는 정군이 좋아하는 레이몬드 카버의 문장에 대해서도 한동안 떠들어댈 것이다. 아무렇지 않은 듯 평범해 보이는 문장이지만, 레이몬드 카버는 두 세 개의 의미를 한 문장에 겹쳐 놓는다. 그래서 독자로 하여금 허투루 쓰는 문장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소름이 돋게 만든다. 그리고 나는 고장난 주크박스처럼 반복해서 “정군이 글을 썼으면 좋겠어!”라는 나의 바람을 이야기해봐야겠다. 그런데 무얼 먹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