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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문약방 Oct 24. 2022

조동진의 노래를 듣는 시간

-유방암에 하명희의 「종달리」를 처방합니다

 1. 우리는 다르게 도는 행성이었지만

  내가 바람과 알고 지낸 기간은 십여 년이 넘었지만, 바람은 나의 ‘절친’이 아니다. 함께 세미나를 하거나 일을 한 적이 거의 없다. 우리는 다른 주기로 도는 행성들처럼 문탁네트워크라는 같은 공간을 다르게 오고 갔다. 내가 기억하는 바람의 몇 가지 이미지가 있다. 어느 날 갑자기 초록색으로 머리카락을 염색하고 나타났을 때의 산뜻함, 10박11일 동안 안나푸르나를 등반했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의 놀라움, 깔끔한 글씨체로 써내려간 이문서당 노트를 보았을 때의 정갈함, 주방지기를 맡았을 때의 상냥함 등. 대체로 나와는 ‘거리’가 멀게 느껴지는 모습들이다. 내 생각에 바람은 알고 지내면 좋은 이웃이지만, 속내를 털어놓고 지내는 친구는 되지 못할 것 같은 ‘거리감’이 있었다. 예의 바르고 깔끔하고 안정된 삶을 사는 사람들에 대한 나의 편견이 있다. 정말 나와는 다른 주기로 돌고 있는 행성을 바라보는 느낌이다. 서로를 바라볼 수는 있지만, 부대낄 일은 없는 무해한 관계라 할 수 있다. 

  언젠가 바람이 남편을 따라 필리핀으로 간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가기 직전 건강검진에서 유방암 진단을 받아 수술을 했다는 소식까지 들려왔다. 유방암소식에 깜짝 놀라기도 했지만, 그 밖에도 무수한 일들이 일어났기 때문에 바람의 이야기는 빠른 속도로 나의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 그리고 5~6년의 시간이 지나는 동안 바람은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고, 나는 만성신부전 진단을 받게 되었다. 그즈음 나는 바람의 ‘환자’생활이 궁금해졌다. 바람은 수술과 그 이후의 시간을 어떻게 보냈을까? 질병으로 인한 고통 말고도 다른 어려움이 있지 않을까? 이제 막 환자가 된 사람으로서, 나는 나보다 먼저 환자생활을 경험한 선배의 조언이 필요했다. 

  “처음 암진단 받고 놀라기는 했지만, 그렇게 많이 놀라지는 않았어요.”

  두둥!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바람은 암진단 정도쯤은 우습게 넘길 수 있는 ‘강심장’이었던 것일까? 

  “친정엄마가 50대 초반에 암으로 돌아가셨어요. 수술하고 2년 만에 돌아가시는 모습을 봤기 때문에, 나도 엄마처럼 암진단을 받을 수 있다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다른 사람들보다는 좀 덜 놀랐던 것 같아요.”

  아!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정어머니가 결혼 전에 돌아가셔서, 바람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하는 과정에서 어머니의 부재가 크게 와닿았다고 했다. 바람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도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의 죽음을 떠올렸다. 나는 결혼을 앞둔 이십대 중반이었고, 초상을 치르는 동안 ‘딸 없는 사람 서럽겠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울었다. 아버지와의 인연이 끝났다는 사실이 당황스러웠고, 본능적인 슬픔으로 울었다. 그러나 그 이후 살면서 내가 아버지의 부재를 느낀 순간들은 별로 없다. 나는 이미 성인으로 성장했고, 새롭게 가정을 꾸려 내 살림을 사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아니라 어머니라면 이야기는 달라졌을 것이다. 나는 지금 친정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지만, 같이 살지 않을 때에도 두 아이의 출산과 육아기간 동안 어머니는 ‘빵구 나지 않는 스페어’로 자질구레한 일들을 도맡아서 처리해주셨다. 내가 이만큼 살고 있는 것에는 무시할 수 없는 어머니의 ‘지분’이 있다. 어머니가 있어도 동동거렸던 시간들을, 어머니가 없었다면 나는 아마 중도 포기해버렸을 것이다. 

  “우리집 애들도 딸이라 암진단 받았을 때 그게 가장 마음에 걸렸어요. 딸들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할 때, 내가 딸들을 도와줄 수 없으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이 들더라구요.”

  바람은 상피내암 0기를 진단받았는데, 조기에 발견해서 수술 후의 예후가 좋았다. 통상적으로 5년 동안 전이가 일어나지 않으면 ‘완치’라고 볼 수 있는데, 바람의 수술을 담당하신 의사선생님은 끝까지 ‘완치’라는 말을 하지 않으셨다고 한다. 그만큼 ‘조심스러운’ 말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경과가 좋다고 해도, 바람의 환자생활에 어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닐 것이다.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저는 탄 음식 먹으면 안 돼요, 술 마시면 안 돼요, 담배연기 안 돼요”라고 꼬박꼬박 말해줘야 하고, 그런 말을 하는 ‘까다로운 사람’으로 보이는 것을 감수해야 했다. 무엇보다 보이지 않은 암세포가 혹시 내 몸에서 자라고 있는 것은 아닌지 두려워하며, ‘조마조마’하는 마음으로 5년의 시간을 보냈다는 사실이 가장 피를 말리는 일이 아니었을까?

  “엄마의 죽음을 보면서 저는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미루지 말고 하자, 그리고 암이든 죽음이든 닥치면 그것대로 받아들이자, 아쉬움을 남기지는 말자, 이런 얘기 우리 자매들끼리 많이 해요.”

  그래서 바람은 사십대에 체력이 안 되는데도 백두대간 종주를 마치고, 안나푸르나 등반도 갈 수 있었다. 당시 바람이 안나푸르나에 다녀와서 만든 영상에세이에는 “돌아가신 지 19년이 되었지만, 어머니 생각을 하면서 산에 오르고 있다. ‘엄마 사랑해요!’”라는 문장이 자막으로 씌어져 있었다. 그때 나는 무슨 사연이 있는 것인지 알지 못해 고개를 갸웃거렸는데, 이제는 바람의 문장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2. 죽음을 기억하는 애도여행

  바람의 이야기에서 어머니의 죽음과 암은 ‘나쁘다’라고만 볼 수 없는 ‘좋은’ 측면도 갖고 있었다. 삶의 일회성과 유한성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마음의 준비가 일상을 단단하게 만들어 줄 수 있다는 사실을 바람의 이야기는 아주 잘 보여준다. 뜬금없이 나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안타까움을 품고 살아가는 바람에 비해 아버지에 대한 애틋함이 사라져버린 내 모습이 서운하게 느껴졌다. 아버지와 함께 산 이십오 년의 흔적은 내 삶에 어떻게 남겨져 있을까? 아버지는 내가 배우자를 선택하는 데 하나의 기준이 되었을 것이다. 아버지처럼 잘생긴 남자를 만나고 싶지만, 아버지처럼 생활력 없는 남자는 만나고 싶지 않다는 단호함이 내게 있었다. 그 외의 것들은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대학입시를 마치고 막 뇌졸중으로 쓰려져 거동이 불편한 아버지와 과천 대공원에 단 둘이 놀러갔던 기억을 끝으로, 아버지는 내 인생의 사진첩에서 사라졌다. 그 후 아버지는 바깥활동을 하지 못하고 집안에서 어머니의 수발을 받다 돌아가셨다. 병색이 완연했던 아버지의 모습을 기억하고 싶지 않은 나의 무의식이 아버지에 대한 생각 자체를 틀어막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문득 떠오른 아버지에 대한 생각으로 마음이 복잡할 때, 하명희의 단편소설 「종달리」(『고요는 어디 있나요』, 북치는소년, 2019년)을 읽게 되었다.      


“얼음을 밟으면 이렇게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나잖아. 이거 요정의 뼈가 부러지는 소리다.”

정이가 그 말을 하며 괜히 얘기했나 하며 내 표정을 살폈다.

“요정의 뼈가 부러지는 소리라고?”

무슨 얘기를 해도 사고 현장이 연상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는 3년 동안 매일 말을 고르고 할 말을 숨기고 때론 소리를 지르며 상처를 내기도 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는 그것이 연이의 자리라고, 그러니 너무 조심하지 말자고 사인을 보내고 있었다. 

(「종달리」, 『고요는 어디 있나요』, 북치는소년, 2019년, 219쪽)     


정이가 우물쭈물하다 “사실은 나……” 하고 나를 쳐다보았다.

“쌍둥이예요.”

“쌍둥이 하나는 어디 있는데?”

정이는 자기 가슴을 한 손으로 꾸욱 눌렀다.

“여기!”

언니를 잃은 이후에는 누가 물어 봐도, 아니 스스로 쌍둥이라는 말을 한 번도 한 적이 없는 아이였다. 나는 쌍둥이라는 정이의 말이 얼마나 용기를 낸 말인지 알고 있었다. 정이의 말은 이번 여행의 가장 큰 선물이었다. 나도 손으로 가슴을 누르고 한 손으론 정이의 어깨를 끌어당겼다.                                                  

(「종달리」,  같은 책, 223쪽)     


  「종달리」는 딸의 중학교 졸업 기념으로 제주도 여행을 온 모녀의 이야기이다. 이 가족에게는 3년 전에 자매의 언니가 사고사를 당하는 참척의 고통이 있다. 형제자매의 죽음은 남겨진 아이에게도 충격적인 상실일 텐데, 남겨진 아이들은 자신의 고통보다 부모가 감당해야 하는 고통의 무게를 먼저 헤아리게 된다. 하나의 슬픔이 더 큰 슬픔에게 마음을 양보하는 것이다. 「종달리」에서는 죽은 언니 연이와 남겨진 동생 정이가 ‘쌍둥이’였다는 사실이 여행 후반에 밝혀지면, 눈시울이 붉어지는 슬픔을 가슴 시리게 표현하고 있다. 이 부분을 읽을 때, 나는 잠시 책을 손에서 내려놓았다. 정이와 엄마의 마음을 알 것만 같아서, 숨이 멎을 것 같았다. 그러나 안다. 나는 결코 소설 속 인물들의 마음을 액면 그대로 느낄 수는 없다.     

 

“나를 붙잡고 울더라고. 차도 빌렸겠다, 널찍하니 길도 좋겠다, 운전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막상 운전대를 잡으니까 너무 무서웠대요. 그런데 어떡해? 이미 차를 빌렸으니 무조건 직진만 했다나요. 길에다 차를 버리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으니까 기운이 빠질 때까지 직진만 해서 달집까지 온 거죠. 그래놓고는 하룻밤을 자고 나서는 차를 끌고 갈 자신이 없다면서 또 엉엉 우는 거예요. 나, 그때 웃겨서 혼났어요. 뭐 이런 단순한 사람이 다 있나 싶어서. 근데 그 사람이 누구냐면…….”

“저예요.”

동백 아가씨가 뒤집개를 들고 웃었다.

“차는 보내고 저는 여기 남았어요. 집사님이 여기서 반년살이 할 수 있게 해주어서 스태프로 참여했고요. 웃기죠? 면접에서 스물한 번째 떨어지고 나니까 뭐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혼자 여행하고 운전도 해보겠다고 오기를 부렸는데 안 되더라고요. 그래도 후진이나 리턴하지 않고 여기까지 온 게 어디예요. 나는 내가 기특해 죽겠어요.” 

  (「종달리」, 같은 책, 222~223쪽)     


  제주도 여행에서 정이는 언니의 죽음을 애도하는 눈물을 흘리고, 자신이 쌍둥이 언니를 잃고 남겨진 쌍둥이 가운데 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게스트하우스의 다른 손님들에게도 용기 내어 말한다. 정이의 애도에는 ‘용기’가 필요했다. 정이의 용기는 게스트하우스의 스태프 ‘동백’에게도 용기를 준다. 동백은 면접에 연이어 떨어지자 훌쩍 여행을 떠나 내 마음대로 인생을 운전해보겠다고 오기를 부려보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 또 하나의 좌절을 맛본다. 6개월간 제주도 동쪽 끝에 있는 마을 종달리의 게스트하우스에 눌러 앉았던 동백은 정이의 용기를 목도하며, 다시 길을 떠나보기로 용기를 낸다. 용기도 전염이 된다. 단편소설 「종달리」의 미덕은 가슴 미어지는 슬픔을 말하고 있지만, 슬픔을 말하는 용기가 상실을 견디는 힘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동시에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프지만, 우리는 아픈 마음을 품고 ‘영글은’ 사람이 되어간다.     

      

  3. 슬픔이 너의 가슴에

  만성신부전 진단을 받고 혼자 내 질병에 대한 걱정에 휩싸일 때, 나는 조동진의 노래를 들었다. “슬픔이 너의 가슴에 갑자기 찾아와 견디기 어려울 때 잠시 이 노래를 가만히 불러보렴 슬픔이 노래와 함께 조용히 지나가도록 내가 슬픔에 지쳐 있었을 때 그렇게 했던 것처럼.” 나는 조동진 3집 앨범에 수록된 이 노래를 발매 당시에는 알지 못했다. 올해 초 신문에서 조동진의 3주기를 추모하며 <reminds 조동진> 앨범이 나온다는 기사를 읽게 되었는데, 장필순은 인터뷰에서 ‘슬픔이 너의 가슴에’ 라는 노래가 조동진을 잃은 슬픔을 어루만져주는 위로가 되었다고 말했다. 그래서 찾아듣게 된 이 노래에서 저음의 조동진의 목소리와, 허스키한 장필순의 목소리가 나에게도 위로가 되었다. 한없이 바닥으로 가라앉은 마음 위로 장막을 쳐주는 느낌이었다. 그 장막 안에서 괴롭고 답답하고 지루했던 시간이 느리게 흘러갔지만, 음악과 함께 지나갔다. 그래서 나는 질병이 가져다준 고독과 외로움을 고요히 느껴볼 수 있었다. 

  “혼자 울기도 했어요. 왜 속상하지 않았겠어요. 무섭기도 하고.”

  그날 바람과 나는 주변 사람들의 배려에도 불구하고 환자가 느낄 수밖에 없는 고독과 외로움에 대해 이야기했다. 가족과 친구들이 아픈 나를 위해 마음을 쓰고 있다는 사실이 많은 위로가 되지만, 어쩔 수 없이 환자 혼자 감당해야 하는 몫이 있다. 그 서늘함이 그 사람의 ‘삶의 이력’이 되고, 다른 사람과 구별될 수 있는 ‘차이’가 된다. 그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바람과 나는 서로의 이야기에 공감할 수 있었다. ‘너 이런 아픔이 있었지?’ ‘나는 이런 아픔이 있었어!’ 서로 겉도는 이야기를 하는 듯이 보여도 아픈 사람들의 대화가 갖는 공감대가 있다. 그날 바람과 나는 지금 유방암으로 항암치료를 받고 있는 또 다른 친구에 대한 걱정도 함께 나눴다. 그 친구에게 주변 사람들이 해줄 수 있는 실질적인 도움이 무엇이 있을까라는 나의 질문에 바람은 이렇게 대답했다.

  “반찬 만들어주는 것 좋아요. 환자가 먹는 게 아니라도, 다른 식구들 끼니도 어떻게든 해결해야 하니까, 반찬을 만들어주면 부담을 줄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 그 친구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 친구를 응원하는 ‘진심’이 전달되면 큰 도움이 될 거예요.”

  바람은 필리핀에 있을 때, 만나지 못하지만 전화를 걸어와 자신의 안부를 묻는 친구들의 마음이 너무 고마웠다는 말을 전했다. 맞다! 나도 친구들의 안부 전화에 감동을 받았다. 걱정과 위로가 섞인 조심스런 목소리가 전화기로 들려올 때, 그 사람의 훈기가 느껴졌다. 나는 누군가의 불행에 대해 마음을 내서 위로해주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불편한 이야기를 꺼낼 용기가 없었고, 그게 그 사람에게 도움이 될까 의심하고 망설이다 포기해버리는 쪽이었다. 초코파이 광고에서는 ‘말하지 않아도 안다’고 하지만, 말하지 않으면 알 수 없다. 

  최근 들어 유방암 관련 기사가 자주 눈에 뜨인다. 암 발병 1위가 폐암이었는데, 얼마 전에 유방암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더욱이 젊은 환자들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에 주목해야 한다고 기사들은 강조해서 말하고 있었다. 유방암은 건강해 보였던 내 친구에게 발병한 것처럼, 부쩍 우리 가까이 다가와 있는 질병이다. 이 글은 바람의 처방전을 빙자해서 지금 유방암을 겪고 있는 내 친구에게 보내는 메시지이다. 외롭고 고독할 때, 조동진의 음악을 들어보자. 서늘하게 담담하게 고요하게 그 시간이 지나갈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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