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업주부의 우울증에 백수린의 「폭설」을 처방합니다
1. ‘지쳤거나 좋아하는 게 없거나’
대학교수인 남편과 세 아이, 한적한 교외의 주택, 그의 조건을 떠올릴 때, Y는 별 문제가 없어 보인다. 이제 막 40대에 접어든 그의 나이를 생각하면 운이 좋은 편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들 부부는 또래들보다 일찍 생활의 기반을 잡았고, 남편의 직업도 안정적이다. 그들 부부에게 위기라고 부를 만한 심각한 문제는 없을 것 같다. 정말 그럴까? Y의 남편은 지방대학 교수라 주중에는 학교가 있는 지역에서 지내고 주말에 집에 온다. 아이들은 네 살, 여덟 살, 열 살, 아직은 부모의 손이 많이 가는 때이다. 그의 남편은 아내에게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이해하지만, 남편 없이 세 아이를 돌보야 하는 Y의 육아스트레스를 그대로 체감하지는 못한다. 아마도 막연히 아내가 힘들겠구나 짐작하는 정도. 그러나 짐작과 실제의 차이는 생각보다 크다.
“못 견딜 만큼 힘들지는 않아요. 그런데 의식하지는 못하지만 제가 혼자 아이들을 돌봐야한다는 일에 긴장을 많이 하는 것 같아요. 그 긴장이 하루하루 쌓이다, 남편이 올 때쯤 되면 참을 수 없다는 느낌을 받아요. 남편은 남편대로 학교와 집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것 같고, 우리는 우리대로 남편 없는 생활에 익숙해지는 것 같고. 이런 가족형태가 괜찮은지도 모르겠어요.”
부부는 일본 유학시절에 만나 남편은 박사학위를 따고 Y가 석사학위를 마쳤을 때 결혼을 했다. Y의 전공은 ‘환경경영’이다. 대학부터 일본으로 유학을 갔던 Y는 국제외교에 관심이 많았고, 그러한 일을 하는 사람이 될 줄 알았다.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외무고시를 2년 준비하기도 했다. 석사를 마치고 한국에 들어오자마자 결혼생활이 시작되었고, ‘환경경영’이라는 자신의 전공을 살려 일을 하기는 쉽지 않았다. 기업경영에 환경정책을 제안하거나 연구결과를 국가정책에 반영될 수 있도록 조직하는 일들은 여의도에 몰려 있었고, 살림을 하고 아이를 기르며 거기까지 출퇴근한다는 게 엄두가 나지 않았다.
“저는 지금 제가 가장 못하고 하고 싶지도 않았던 ‘전업주부’라는 직업을 가지고 살고 있어요.”
Y에 대한 나의 첫인상은 ‘야생적이다’는 느낌이었다. 그 느낌은 40대 주부라기보다 싱글이 더 어울릴 것 같은 ‘소년미’에 가까웠다. 나는 그가 아이가 셋이고 전원주택에 살고 있다고 해서 친환경적인 라이프스타일에서 그런 야생적인 분위기가 묻어나는 것이라고 짐작했다. 건강하게 햇볕에 그을린 소년처럼 풋내 나는 활기와 성인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든 초롱초롱한 눈빛이 인상적이었다. 내 느낌과 달리 Y는 나에게 자신의 무기력과 우울을 이야기했다. 사실 자신은 활기찬 사람인데, 자주 무기력감에 빠지고 그 느낌이 너무 싫다고 했다. 견딜 수 없을 때 남편에게 아이들을 맡기고 무작정 서점으로 달려가서 이 책 저 책을 찾아보는데, 어느 날엔가 『지쳤거나 좋아하는 게 없거나』(글배우, 강한별, 2019년)라는 책을 발견하고 자신의 무기력을 이해하게 되었다고 했다. 자신이 열심히 살지 않은 것이 아니라 지금은 잠시 지쳐 있는 것일 뿐이라는 말이 위로가 됐고, 좋아하는 걸 찾지 못했을 때 일시적으로 공허감이 들 수 있다는 말에 안도가 되었다고 한다. 모두가 짐작하듯이 아이가 셋인 전업주부의 일은 많다. 아이들이 아플까 걱정되고, 공부도 봐주어야 하고, 친구관계도 신경 써야 하고, 아이들 친구 엄마들과의 커뮤니티도 적절히 유지해야 한다. 아이들과 남편, 아이들 친구 엄마 등 겹겹이 쌓인 ‘밀당’ 관계가 Y를 둘러싸고 있다. 그리고 Y는 엄마와 아내라는 역할 말고 자신만의 일이 있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은 욕망도 있다. 오랫동안 공부를 해왔던 Y에게 그런 욕망이 있다는 것은 자연스럽다. 다만 지금 그의 조건 속에서 자신이 그간 해왔던 공부와 방식으로는 그만의 커리어를 쌓을 수 있는 일을 찾기가 어렵다는 것이 문제다. Y는 어떤 전환의 시점에 놓여 있다.
2. 오리엔테이션 없는 결혼생활
언젠가 나는 남편이 일하는 필리핀으로 혼자 찾아갔던 적이 있다. 인천공항에서 저녁 8시 25분에 출발해 마닐라에 밤 10시(한국과 필리핀은 1시간의 시차가 있다)에 도착하는 항공편을 이용했다. 어둠이 내려앉은 마닐라공항에 도착했을 때, 주변에서 들려오는 말들이 영어가 아니라는 사실에 나는 당황했다. 영어를 잘하는 사람이 아닌데도, 외국의 공항에서 그나마 알아들을 수 있는 영어가 아니라 분절되지 않고 들려오는 필리핀 현지인들의 타갈로그어는 공포로 다가왔다. 입국절차에 문제가 생기면 영어도 잘 못하는 내가 어떻게 난관을 해결할 수 있을지 소름이 돋았고, 인천공항에 비해 규모도 작고 허술해 보이는 마닐라공항의 시스템에 대해서도 의심 가득한 눈빛으로 두리번거렸다. 그 순간 나는 처음 ‘이방인’의 취약함을 체감했다. 외국인이 된다는 것은 낯섦과 그로 인한 공포가 일상적으로 반복된다는 것이고, 타자가 된다는 것은 그런 고달픔을 감수하는 것이었다.
Y가 일본어를 익히지 못한 상태에서 일본 유학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는 자신의 이십대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나는 마닐라공항에서의 긴장되고 당황스러웠던 느낌이 떠올랐다. 중고등학생 시절 공부를 잘했던 Y는 우등생의 자신감으로 낯선 곳에서의 ‘언어/공부/생활’의 삼중과제를 씩씩하게 헤쳐 나갔다. 일본어를 못하는 외국인이 할 수 있는 패스트푸드매장 아르바이트를 시작으로 유학 기간 내내 공부와 일을 병행하며 외국인으로서의 자신의 생활을 꾸려나갔다. 집에 도움을 받을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나는 이러한 이력이 그에게 긍지와 자부심이며 동시에 긴장과 피로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석사학위를 마쳤을 때, 남편의 프러포즈에 선뜻 결혼을 선택하게 된 데에는 이런 긴장감을 해소하고 싶은 심리적 기제가 작동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런데 결혼과 동시에 Y는 다시 또 다른 ‘외국’에 입국하게 된다. 일본어를 모르는 채 유학생활을 시작했던 것과 같이, 주부의 역할에 대한 오리엔테이션 없이 출근과 퇴근이 없는 결혼생활이 시작되었다. 나는 유학과 결혼 사이 일정 정도 Y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면, 결혼 후 Y의 당황스러움이 조금은 덜하지 않았을까 하는 안타까움을 느낀다. 또는 Y가 이십대의 시간을 일본이 아니라 한국에서 또래 친구들과 ‘취업/연애/결혼’에 대한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주고받으며 보냈다면, 나름대로 결혼생활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또 다른 안타까움을 느낀다.
나 역시 오리엔테이션 없이 펼쳐진 결혼생활에 당혹스럽고 무기력했다. 나에게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 같고, 몸에 맞지 않는 옷에 몸을 맞추고 싶지 않다는 생각의 반동이 강했다. 그래서 유치원생 아이 둘을 키우며 대학원에 진학하고자 결심했다. 그때 나의 조급함은 하루 빨리 낯선 땅에서 탈출해서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향수병 같은 거였다. 이해할 수 없는 장난감과 놀이에 집착하는 아이들이 아니라 어른들과 ‘어른다운’ 말을 해보고 싶다는 절박함이 있었다. 그러나 그리워서 돌아갔던 학교는 이십대 때 내가 경험했던 그 모습이 아니었고, 아이 둘을 가진 나도 나 하나 책임지면 되는 홀가분한 이십대가 아니었다. 문제를 해결하고자 찾아간 학교는 또 하나의 외국이었고 고달픔이었다.
이때를 돌이켜보면 나는 비장했다. 아이들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안 된다고 긴장했고, 과제를 성실히 하지 않는 기혼여성 학생이라는 평판을 듣고 싶지 않았다. “똑똑해지고 강해져야 한다”고 내내 다짐했지만, 외로웠고 피로했다. 내 애로사항을 남편도, 전업주부인 같은 아파트 여자들도, 결혼하지 않은 동료학생들도, 결혼한 남자 선배들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 속단했다. 그래서 나는 공부와 육아에 관련된 모든 결정을 혼자 잘해내야 한다는 부담감 속에 짓눌려 있었다. 지금은 후회된다. 왜 그때 주변에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을까?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어! 너무 힘들어!”라고 털어놓지 못했을까? 그랬더라면 아마도 누군가 도움을 주거나, 고민을 털어놓았다는 사실만으로도 긴장을 풀 수 있었을 텐데, 누구도 내 문제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독단에 빠져 있었다.
3. 침착하고 꼼꼼하고 영리하게」
소설가 백수린은 2011년 「거짓말 연습」으로 등단한 이래, 『폴링 인 폴』(문학동네, 2014년), 『참담한 빛』(창비, 2016년), 『여름의 빌라』(문학동네, 2020년) 등 세 권의 창작집을 부지런히 발표했다. 10여 년의 기간 동안 놀라운 생산력을 보여주는 백수린 작품의 한 경향으로는 베를린, 베네치아, 파리, 런던, 캄보디아 등 이국적 장소에서 외국어로 의사소통하는 사람들 사이의 ‘오해/공감’를 다루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의 의사소통은 문법체계가 다른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번역 불가능한 지대를 포함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어의 한계를 넘어선 소통의 가능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외국어는 소통의 어려움을 은유하기 위한 소설적 장치라고 볼 수 있는데, 이국적인 배경이 가져오는 낯섦과 애매모호함 속에 오랜 비밀, 잊혀진 기억, 어긋나는 시선, 마음의 앙금 같은 것들을 투과시킴으로써 백수린은 “인생의 불가사의”에 영리하게 다가간다. 그래서 그의 소설에서는 아무 일 없어 보이지만, 아무 일 없었다고 말할 수 없는 ‘비하인드 스토리’들이 촘촘하게 그려진다.
단편소설 「폭설」은 열한 살에 부모의 이혼을 겪은 여성의 엄마에 대한 양가감정을 다루고 있다. 엄마는 눈에 띄는 미인이었고, 눈이 오는 날 학교를 결석하게 해줄 만큼 남다른 감성의 소유자였다. 너무 사랑하는 엄마가 “이제 아빠가 아닌 다른 남자를 사랑하게 되었다”고 자신의 선택을 밝혔을 때, 그녀는 엄마의 선택을 원망할 수 없었다. 그러나 섭섭함과 결핍감 또한 분명히 있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삶을 선택하며 사는 거야.” 그녀의 입에 묻은 크림을 닦아주거나, 어깨에 다정히 팔을 두르면서, 열두 살의 그녀는 엄마를 사랑하는 마음만으로 가득했기에 엄마가 하는 모든 말들을 믿었다. 하지만 사춘기에 접어든 그녀는 모든 사람이 엄마와 아빠 중 한 명을 선택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만큼은 영리해졌다. 오랜 시간이 흐른 후 그녀는 어쩌면 미국에 갈 때마다 자신이 원했던 것은 엄마의 불행한 모습을 보는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엄마가 사라지고 난 이후 그녀에게 생긴 커다란 구멍처럼 엄마에게도 메워지지 않는 구멍이 생겼음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그녀는 엄마가 한순간 잘못된 선택을 했지만 실은 그녀를 떠난 것을 후회하고 있기를 바랐다. 그렇지만 어느 순간, 엄마 역시 선택을 했다는 것이, 그 선택의 순간에 그녀는 우선순위에서 밀렸다는 것이, 세상이 모든 엄마들과 달리 엄마는 자식보다 자신을 더 사랑한다는 것이 그녀에게 명확해졌다. 그녀는 열네 살의 여름방학을 끝으로 더 이상 미국에 가지 않기로 결심했다. (「폭설, 『여름의 빌라』, 문학동네, 2020년, 125쪽)
이후 엄마는 아주 행복해 보이지도 그렇다고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도 않으며 살아가고 있다. 그녀는 정서적으로 불안한 이십대를 보냈다. 이십대 후반에야 시작된 첫 연애가 불과 몇 달 만에 끝났고, 여자라는 이유로 입사 동기 중에서 유일하게 계약 해지 통고를 받아, 인생이 엉망진창이라는 열패감에 시달릴 때, 엄마는 옐로스톤 국립공원으로의 로드 트립을 제안한다. 여행중 갑자기 내린 폭설에 모녀의 차는 인적 드문 도로에 갇히게 되고 야생동물들이 차로 돌진해올 수 있는 위험과 두려움에 휩싸인다. 엄마는 긴장을 풀기 위해 가볍게 딸의 연애를 물어봄으로써, 그녀의 ‘분노스위치’를 눌러버린다.
“엄마한테는 세상에서 연애가 가장 중요해?”
“가장 중요한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취업보다야 연애가 훨씬 중요하지. 사랑받고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건데.”
엄마는 정말 모르는 걸까?
서서히 드리우는 어둠의 장막 위로 눈송이가 돌풍을 타고 솟구쳐오르다가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그녀는 엄마에게 제대로 사랑을 받지도 못한 사람이 누군가를 사랑하는 법을 배우긴 했겠느냐고 말하기 시작했다. 그럴 생각이 아니었는데 한번 말을 꺼내자 감정이 걷잡을 수 없이 고조되었다. 그녀는 엄마가 얼마나 이기적인 사람인지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엄마의 그 대단한 사랑이 그녀와 아빠를 얼마나 고독하게 만들었는지에 대해서 퍼부었다. 이제와 엄마가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어떤 것들은 이미 그녀 안에서 훼손이 되어버려 두 번 다시 돌이킬 수 없을 것이라고도 그녀는 울음을 삼켜가며 말했다. (「폭설, 같은 책, 135~136쪽)
‘폭설’은 갑자기 내린 눈이다. ‘갑자기’는 계속되지 않고 곧 지나간다. 모녀의 차도 누군가의 도움으로 빙판에서 벗어나고, 곧 그들은 언제 눈이 왔냐 싶게 화창한 옐로스톤 국립공원을 통과한다. 위기의 순간이 지나자 머쓱해진 딸에게 엄마는 웃으며 말한다. “짐승을 한 마리도 치지 않고 빠져나올 수 있었으니 우린 참 운이 좋구나.”(138쪽)
백수린은 「폭설」에서 유년기의 결핍감을 채울 수 없다는 정신분석학적 해법이 아니라 ‘모든 게 엄마 때문이야!’라고 악다구니를 퍼부었던 딸이 첫 아이를 출산해서 엄마가 되는 엔딩장면으로 마무리하고 있다. 떠나간 엄마가 결핍감을 주기는 했지만, 그렇게 생긴 마음의 구멍이 한 사람의 인생을 잡아먹지는 않는다. 상서로운 눈이 내린다는 소설(小雪)의 밤, 열한 시간의 진통 가운데 엄마이야기를 들려주는 그녀에게 남편은 묻는다. “그래서 이제는 엄마를 이해할 수 있게 됐어?” 딸이며 동시에 ‘엄마’가 되기로 한 그녀의 결심이 남편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라는 생각이 든다. 구멍에 잡아먹히기 않는, ‘운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분명 그녀는 부단히 애써서 살아왔을 것이다.
단편소설 「폭설」은 엄마의 이혼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혼돈스러워하는 딸의 이야기지만, 내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소설의 전경에 자리한 엄마의 ‘선택’이었다. 엄마는 자신의 기준에 따라 판단하고 선택했고 자신이 원하는 인생을 살았다. 엄마라면 자신보다는 자식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당위로 그녀의 이혼을 일방적으로 비난할 수는 없다. 가족이 해체되는 이혼이라는 형태가 아니라도, 엄마들의 선택은 무엇 하나 쉽지 않다. ‘경단녀’가 재취업을 할 경우, 아이들에 대한 돌봄의 공백을 최소화하기 위해 발을 ‘동동’ 굴려야 하고, 여러 사람에게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한다. 어렵게 한 선택이 좋은 성과로 이어지리라는 보장도 없기 때문에 망설여지기도 한다. 자식들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그야말로 ‘죄인’이 된다. 그래서 엄마들의 선택은 무산되기 십상이다.
나의 경우에 대학원 진학은 성급한 선택이었다. 내가 반성해야 하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그 과정의 ‘성급함’이다. Y의 이야기를 들으며 든 생각도 그녀가 신중하게 자신의 문제를 해석해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왜 원하는가?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떤 방법이 필요한가? 그것을 이루는 데 방해가 되는 것은 무엇인가? 대차대조표를 검토하듯 꼼꼼히 살펴보고, 주변 사람들에게 의논을 했으면 좋겠다. 그러려면 나의 욕망의 정체가 무엇인지 들쑤셔보기도 해야 한다. 나는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 사람인지 알아야 하고 그 이유도 스스로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 최근에 Y를 만났을 때, 제주도로 혼자 여행을 다녀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좋은 출발이다. 이렇게 차근차근 침착하고, 꼼꼼하고, 영리하게 ‘선택’을 공들여 만들어보자. 나는 Y와 세 번 만나서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다. 세 번 만나는 동안 Y의 이야기는 좀 더 구체적이고 분석적이 되어갔다. Y는 폭설이 내릴지라도 그 눈을 잘 피해갈 수 있는 사람이다. Y는 분명 운이 좋은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