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 팬, 법정에 서다

제12화 후크 선장의 조감도

by 임재도

임재도 작가의 법률감성소설

피터 팬, 법정에 서다

존엄사법이 제정되지 않아 살인범이 된 어느 소년의 아버지에 대한 지극한 간병과 사랑이야기






제12화 후크 선장의 조감도



소년은 마당으로 들어섰다. 처마 아래에서 마당을 가로질러 매단 빨랫줄에 백열등 하나가 걸려 마당을 훤히 밝히고 있었다. 백열등 불빛을 보고 모여든 나방들이 전구를 둘러싸고 어지럽게 날며 춤을 추고 있었다. 그 백열등 아래에는 나무 합판에 비닐 장판을 깔아 만든 평상 위에 아버지와 후크 해적단들이 모두 모여 빙 둘러앉아 있었다.


앉은뱅이 작은 술상과 소주병은 평상 모퉁이 한쪽에 밀쳐 두고, 풍경화처럼 그림이 그려진 커다란 마분지 한 장을 가운데에 펼쳐 놓고 있었다. 아버지가 그림 위에 표시된 여러 지점을 손가락으로 짚어 가며 무슨 설명을 했고, 다른 사람들은 아버지의 말을 들으면서 눈을 그림에 열중해 있어 소년이 들어서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 아빠.


소년이 들어서며 아버지를 불렀다. 아버지와 사람들이 그림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 으응, 이제 오느냐. 선생님도 아이들도 모두 집에 갔어?


아버지가 소년에게로 고개를 돌려 말했다.


― 예, 아빠. 엄마는요?


소년이 평상으로 다가가며 물었다.


― 엄마는 몸이 좀 안 좋다며 먼저 주무신다. 너도 피곤할 텐데 씻고 그만 자거라.

― 예.


소년은 대답하고 평상 옆을 지나가면서, 아버지의 어깨너머로 가운데 펼쳐져 있는 그림을 바라보았다. 그림의 위쪽 중앙 직사각형 네모 칸 안에 <초도(토끼섬) 관광휴양 섬 조감도>라는 글자가 쓰여 있었다. 소년은 불쑥 호기심이 솟았다.


― 아빠, 이 그림이 뭐예요?

― 으응, 이거 말이냐? 으음, 뭐라고 해야 할까? 아빠가 구상한 이 토끼섬의 미래 모습. 앞으로 아빠가 만들어 갈 이 토끼섬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 놓은 것이지.

― 와, 이거 아빠가 직접 그린 거예요?


소년이 어느새 평상으로 올라와 아버지와 스미 갑판장 사이에 무릎걸음으로 끼어 앉으며 물었다.


― 그래, 아빠 그림 솜씨 좋지? 엄마만큼은 아니지만, 아빠도 그림을 잘 그리지?

― 예. 아빠 정말 멋져요.


그렇게 말한 소년은 두 손을 짚고 무릎걸음으로 엎드린 채 고개를 앞으로 쑥 내밀고 그림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뒷발로 서 있는 토끼 형상의 섬의 전경이 커다랗게 그려져 있고, 섬의 해안을 빙 둘러싸듯 이어 놓은 둘레길과 이 둘레길에서 산 정상으로 이어지는 세 개의 등산로가 먼저 눈에 띄었다.


등산로는 노란색으로 채색되어 있어 쉽게 눈에 띄었다. 그리고 푸르게 칠한 숲과 바다, 회색으로 칠한 해안절벽과 바위, 그 사이사이 중간에 다양한 형태와 색깔의 건물 그림이 그려져 있었는데, 그 그림 아래에는 건물의 이름이 표시되어 있었다.


선착장, 주차장, 관리사무실, 낚시터, 전망대, 숙박시설(펜션 지대) 같은 단어 이외에도 <해양생태공원>, <자생 식물원>, <명상 및 자연치유 건강센터>, <열대림 공원>, <조각공원>, <자생난 배양재배실> 같은 생소한 말도 있었다. 그러나 이 그림만으로는 아버지가 구상하고 있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잘 알 수 없었다.

그때 빌 주크스 역할을 했던 투틀즈의 아버지가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 형님, 정말 이대로만 된다면 이 토끼섬은 전국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휴양 섬이 될 것 같습니다.

― 그렇겠지? 꼭 만들고 말 거야. 이 때문에 내가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이 섬에 왔으니까. 내 평생의 사업이 될 거야. 만약 내 생전에 다 못 한다면 이애가 이어받도록 해야지.


아버지가 그때까지도 여전히 무릎걸음으로 엎드린 채 그림을 들여다보고 있는 소년의 등을 가볍게 토닥이며 말했다. 그리고는 팔을 뻗어 스미 갑판장의 어깨에 손을 얹고 말했다.


― 지금까지는 나 혼자서 힘들었는데, 다행히 이 후배도 서울에서 내려와 투자도 하고 돕겠다고 하니, 백만 응원군을 얻은 기분이야.

― 형님, 저희도 돕겠습니다. 우리 고향이 이렇게만 개발된다면, 어떤 도시가 부럽겠습니까? 서울이 부럽겠습니까, 부산이 부럽겠습니까? 안 그래?


이탈리아인 쎄코로 분장했던 웬디의 아버지가 투틀즈와 슬리의 아버지를 번갈아 바라보며 동의를 구하는 눈길로 말했다.


― 그럼요. 형님, 저희도 돕겠습니다.


두 사람이 동시에 말했다.


― 고맙네. 고향의 아우님들도 나서서 돕겠다고 하니 힘이 더 나는군. 자, 이제 이 조감도는 접어 두고 한 잔 더 하지.


아버지가 조감도가 그려진 마분지를 돌돌 말아 팔목에 차고 있던 고무줄 밴드로 채웠다. 투틀즈의 아버지가 평상 모퉁이에 밀쳐놓았던 술상을 다시 가운데로 가져와 비어 있는 잔에 술을 따랐다. 대학 후배라는 스미 갑판장을 제외한 세 사람은 모두 아버지처럼 토끼섬에서 나서 자란 사람들이었다. 그중에서 소년의 아버지가 제일 나이가 많아 그들은 소년의 아버지를 형님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 아, 오늘은 정말 제가 순수한 동심의 세계로 돌아간 것 같습니다. 제 마음도 순수해지는 것 같습니다. 서울 사람들이 이런 기분을 알기나 할까요? 달빛도 곱고, 정말 아름다운 섬입니다. 선배님이 왜 이곳으로 왔는지 알 만합니다.


스미 갑판장이 소주잔을 들어 단숨에 마시고는 고개를 들어 하늘에 둥실 떠 있는 달을 바라보며 말했다.


― 옛날에는 지금보다 훨씬 더 좋았습니다.


투틀즈의 아버지도 소주 한 잔을 마시고 생선회 안주를 입에 넣으면서 말했다.


― 그랬지. 우리가 어렸을 때 해 질 녘이나 아침이면 이 섬은 마치 한 폭의 수채화 같았지. 그러나 지금은 많이 변했어. 섬도, 물도 오염되고, 사람들의 인심도 각박해지고, 옛날 같지 않아. 이 섬의 풍경뿐만 아니라 인심도 옛날처럼 다시 살려야겠지.


아버지가 스미 갑판장과 투틀즈 아버지의 잔에 술을 따르며 말했다.


― 사실 서울에서 선배님과 같은 업계에 근무하면서 친하게 지내긴 했지만, 이런 구상을 하고 계신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더구나 이렇게 구체적인 계획까지 세워 놓았을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습니다.


스미 갑판장이 말했다.


― 후배님도 서울에서 형님과 같은 변호사 사무실에서 근무하셨던 모양이지요?


웬디의 아버지 이탈리아인 세코가 스미 갑판장을 보면서 말했다.


― 아닙니다. 선배님은 우리나라에서 몇 번째로 큰 로펌의 사무국장이었지만, 저는 조그마한 개인 변호사 사무실의 사무장이었습니다. 선배님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습니다.


스미 갑판장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 이 사람, 사무실이 크다고 하는 일이 다르나. 실력이야 오히려 자네가 한 수 위였지. 그런 소리는 이제 그만하게.


아버지가 손을 흔들며 말했다.


― 사실 선배님은 직장에서 능력도 있었고, 윗분이나 직원들에게 신임도 두터웠지요. 그러던 분이 어느 날 갑자기 훌훌 털어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가던 모습, 다른 사람들은 무모하다고 생각했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선배님의 그 용기가 참 부러웠습니다.


말을 마친 스미 갑판장이 다시 소주 한 잔을 마시고 잔을 아버지에게 내밀었다.


― 하하, 그랬던가?


스미 갑판장이 따라 주는 술을 마신 아버지가 잔을 웬디 아버지에게 건네 술을 따르고는 이어서 말했다.


― 자네들도 알다시피, 돌아가신 내 선친께서 좀 유별난 분이셨나? 아무것도 없는 이 섬에서 이만한 재산을 일군 것도 물론 대단하지만, 자식에 대한 교육열도 대단했지. 자식이라고는 나 하나밖에 없었으니까 더 그랬는지는 모르겠어. 그분은 오직 하나밖에 몰랐지. 내가 법대에 가서 판검사가 되어야 한다는 당신의 그 고집 말이야.


아버지의 뜻을 차마 거스를 수 없어 할 수 없이 법대에 가긴 했지만, 사실 나는 법대에는 가고 싶지 않았어. 오히려 문학이나 철학 쪽에 관심이 많았고, 대학을 다닐 때도 법서보다는 오히려 그런 방면의 책에 심취해 있었지. 그러다 보니 당연히 아버지께서 바라시던 고시공부는 아예 뒷전이었고…….


지난날을 회고하는 듯 잠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고는 아버지가 소주잔을 들어 한 잔 마시고 다시 이어 말했다.


― 졸업 후 그래도 법대를 나와 배운 도둑질이라고 법률사무소에 취직했는데, 이것도 사실 아버지의 눈치를 봐야 했기 때문이었지. 기왕 판검사는 못하더라도 그 언저리에는 있어야 한다는 완고한 아집 말이야. 물론 자네도 겪어 봤겠지만, 로펌이란 곳이 어떤 곳인가. 그곳의 업무란 총칼만 들지 않았을 뿐 하루하루가 전쟁과 다름없지 않나.


그런 내가 그 치열한 전쟁터 같은 로펌에서의 직장 생활을 어떻게 견뎌낼 수 있었겠나. 오직 싸워 이겨야 하는 소송 업무에 나는 숨이 막힐 지경이었지만, 부모님이 살아 계시는 동안에는 차마 직장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오겠다는 얘기를 못 꺼내겠더라고. 그러던 차에 부모님이 돌아가시자 드디어 평소 내가 구상하고 있던 계획을 실천하기 위해 돌아왔지.


이 토끼섬의 미래가 곧 내 꿈이고 희망이야. 나는 아버지가 내게 바랐던 판검사보다는, 내가 꿈꾸는 이런 삶이 훨씬 가치 있는 삶이라고 생각해. 나는 이런 내 비전을 위해 이 토끼섬에 뼈를 묻을 각오를 하고 왔어. 이제야 비로소 내가 가야 할 길을 똑바로 찾아온 것이지.


그러나 내가 꿈꾸는 토끼섬의 미래는 아까 조감도에서 본 것과 같이, 단순하게 섬을 개발하여 돈을 벌고자 하는 관광 섬으로 만들자는 것이 아니야. 오직 경제적 수익을 위한 관광 섬이 아니라, 현대의 물질문명 속에서 자아를 상실해 버린 사람들을 위한 영혼의 쉼터라고 해야 할까?


나는 이 토끼섬을 물질적인 욕망에 피폐해진 삶을 치유하는 영혼의 쉼터, 명상과 힐링의 성지로 만들고 싶어. 늦어도 이삼 년 내로는 이에 대한 구체적 계획과 전망을 적은 책도 한 권 출간할 예정이야. 여기에 대해서는 앞으로 자세히 말할 기회가 있을 테니까, 오늘은 이 정도로 해두기로 하세.


― 그러고 보니 벌써 밤이 깊었습니다. 내일 선생님이 떠나는데, 새벽에 배웅하려면 그동안 잠시라도 눈을 좀 붙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그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웬디 아버지가 말했다.


― 예, 오늘은 너무 늦었네요. 그럼, 형님, 새벽에 뵈입시더.


투틀즈 아버지가 일어서며 말하자, 슬리 아버지도 덩달아 일어섰다.


― 그러세.


아버지가 일어서며 말했다.


― 나오지 마십시오. 저희는 가보겠습니다.

― 안녕히 가세요.


세 사람이 마당을 가로질러 나가고, 소년이 일어나 인사를 했다.


― 그러고 보니 평소 선배님께서는 뭐랄까, 철학적인, 뭐 그런 좀 특별한 데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세 사람이 나간 뒤에도 여전히 술자리에 앉아 있던 스미 갑판장이 자기 잔에 스스로 술을 따라 한 잔을 마시고는 말했다. 아버지와 소년도 다시 자리에 앉았다.


― 내가 특별한 것이 아니라 대다수 보통 사람들이 오직 돈벌이에 급급해서 정작 중요한 것은 잊어버리고 살기 때문이겠지.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근본적인 문제 말이야. 그야말로 영혼이 메말라 버린 그런 삶을 살기 때문이 아닐까.


아버지가 남아 있는 잔을 들어마시고는 말했다.


― 아이고, 저는 그런 어려운 문제는 생각하기 싫습니다.


이제 은근히 술에 취한 스미 갑판장이 과장된 몸짓으로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 어쨌든 선배님의 용기가 정말 대단합니다. 누구나 한 번쯤은 이런 섬에서 살아 보고 싶다는 생각은 하겠지요. 그러나 서울에 사는 어느 누가 실제로 이런 섬에서 살려고 하겠습니까?


― 그럴 것이네. 하루 이틀 놀러 오는 것이면 몰라도, 누가 이런 곳에 와서 평생 살려고 하겠나. 그러나 나는 말일세. 단지 내 고향이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아. 나는 이곳에서 생생한 생명력을 느끼며 자랐지. 파도소리를 들으며, 아련한 꿈을 꾸면서 말일세. 그게 내 영혼인가 봐. 그 영혼이 나를 다시 여기로 이끌고 왔나 봐. 이 아이에게도 그런 영혼을 느끼게 해주고 싶어.


아버지가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버지의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참 편안했다.


― 공기가 좋아서 그런지 술을 마셔도 취하지도 않는 것 같습니다.


스미 갑판장이 아버지의 잔에 다시 술을 따랐다. 술을 쭉 들이켠 아버지가 다시 말을 이었다.


― 그런데, 참 자네 일은 뭐라고 해야 위로가 될지 모르겠네만, 손에 흙 한 번 묻혀 보지 않은 자네가 농사일이나 험한 뱃일을 견뎌 낼 수 있을지 모르겠네. 지금은 시작에 불과하지만, 앞으로는 힘든 육체노동도 직접 해야 할 것일세. 자네가 생각하는 그런 낭만적인 일만은 아니야.


― 예, 알고 있습니다. 사실 부끄러운 일이지만, 아내가 그렇게 바람이 나 집을 나가 버릴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아이들까지 데리고 말입니다. 아내를 찾아가 설득해 보았지만, 이미 틀어져 버린 아내의 마음을 되돌리기에는 늦었더군요. 아이들조차도 내 편이 아닙디다.


아마 그럴 만도 했을 겁니다. 그동안 내 생활을 뒤돌아보면 가정보다는 오직 돈을 버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으니까요. 남편으로 아버지로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더군요. 내가 무섭다고 하데요. 오직 돈밖에 모른다고.


결국 합의이혼을 하고 혼자 텅 빈 집에 있자니, 내가 이제까지 무엇을 위해 살아왔나 하는 자괴감이 들어 미칠 것 같더라고요. 그동안 남에게 손가락질까지 받아 가며 벌어 놓은 돈이 있으면 뭐 합니까, 정작 그 돈을 쓸 가족이 없는데. 그때 문득 선배님 생각이 나더군요.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는 데까지 열심히 한 번 해보겠습니다.


― 그래, 마음 잡힐 때까지 함께 지내보세. 아까도 잠시 말했지만, 나는 오랜 생각과 고민 끝에 필생의 꿈을 갖고 이 섬에 왔어. 난 말일세, 이 섬을 내가 꿈꾸어 온 그런 이상향으로 만들어 볼 참이네. 이상향이라고 했지만, 돈이나 권력, 명예, 그런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닐세.


내가 꿈꾸는 이상향은 자연과 동화된 조화로운 삶, 그러한 삶의 방식의 새로운 패러다임, 진정한 행복의 조건, 그 행복을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하는 근본적인 성찰이라고 할 수 있어. 나는 내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그런 삶을 위하여 열정을 쏟을 것이네.


가끔 생각해 본다네. 내가 이 아이에게 물려줄 것이 과연 무엇일까? 돈 대신 꿈을 물려줘야지. 진정한 내면의 행복을 물려줘야지, 그렇지 않나? 소박하지만 영혼에서 공감하는 그런 꿈, 비전 말이야. 이애가 지금은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나는 믿고 있어. 만약 내가 이루지 못한다면, 언젠가는 이애가 내 비전을 이어받을 것이라고. 내가 꿈꾸는 이상적인 삶의 전형을 이 섬에서 실현할 것이라고.


아버지가 소년의 손을 꼭 잡았다. 그 손길은 포근하고 넉넉했다. 그러나 소년은 조금 전 어깨너머로 보았던 아버지의 조감도에 그려진 내용이 무엇인지, 또 아버지가 물려주겠다고 하는 그런 비전이 무엇인지는 잘 알 수 없었다. 다만 아버지의 손을 타고 흐르는 따뜻한 기운이 전류처럼 흘러 가슴을 뭉클하게 할 뿐이었다.


― 예, 아, 정말 바다가 좋네요. 그런데 형수님께서는 이곳을 좋아하십니까? 서울에서 곱게 자란 그런 미인이……?

― 그게 좀 그렇다네. 지금은 힘들어하지만, 차츰 나아지겠지.

― 선배님은 참 복도 많습니다. 전 말입니다.


스미 갑판장은 이제 혀가 꼬부라져 있었다. 스미 갑판장이 잠긴 목소리로 칭찬인지, 농담인지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고는 마지막으로 말했다.


― 전 말입니다. 정말 형수님 같은 사람만 있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재혼할 것 같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소년은 갑자기 기분이 언짢아졌다. 문득 불길한 예감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소년의 이런 느낌과는 달리 아버지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했다. 저 아래 이슥해진 밤바다 모래사장으로 밀려온 물결이 모래와 자갈을 쓸어내리는 소리가 밤의 여울을 타고 바람결에 아련하게 들려왔다.


이제 아버지도 꽤 취한 것 같았다. 스미 갑판장의 횡설수설하는 말을 너털웃음으로 받아넘기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꿈결처럼 아련하게 들렸다. 달은 이미 서쪽으로 완전히 기울어 졸린 눈을 껌뻑거리고 있었다. 어느새 아버지의 무릎에 고개를 얹은 소년의 눈도 스르르 감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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