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용소의 참상은 다른 행성의 일이다. 무심한 ‘내’가 걷고 있다.
다른 글 <뭣이 중헌디?!>는 이미 말했지만, 나로선 감당하기 어려운 주제다. 전문적인 식견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내겐 ‘모르겠다’가 솔직한 답변이다. 어렵다. 다만 세계시민으로서 고통받는 저들을 위해 기도할 뿐.
한데, 또 다른 글이 눈에 들어왔다. 민간인 학살, 전쟁, 인종 말살(제노사이드) 등의 현장을 ‘15년 넘게 헤매고 다녔던’ 김봉규 기자의 글이다. 윗글에서 고민하던 바와 연결되는 지점이 있다고 판단되어 그의 글을 그대로 옮긴다. 점/토씨 하나 빼지도, 넣지도 않고. 인간이란 과연 ‘어떤 존재’인지를 한번 생각해본다는 의미로.
[나치 홀로코스트의 대명사인 아우슈비츠를 다녀오려고 준비하고 있던 무렵 언론사 선배이며 소설가인 김훈은 나에게 “독일 가면 바이마르의 부헨발트 수용소를 꼭 가보길 바란다”며 당신의 작업실을 찾았을 때 부헨발트와 관련한 두꺼운 도록을 건네주었다.
그 몇 해 전 지인들과 독일 고전주의 대표 작가로서 바이마르에서 생을 마감한 괴테와 쉴러의 삶을 살펴보기 위해 바이마르를 들렀다가 시 외곽에 있는 부헨발트 강제수용소도 살펴보았단다. 김훈은 “그곳에 가보면 인간이 얼마나 야만적이었는지 알 수 있다.”고 말했다.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아우슈비츠 정도만 알고 있었을 뿐, 게토를 포함한 수용소가 나치 치하 유럽에 4만 곳 이상 운영됐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다.
2017년 4월 25일 찾은 독일 튀링겐주 바이마르시 국립극장 들머리엔 괴테와 쉴러 동상이 한 기둥에 함께 세워져 있었다. 인구는 6만5천명(2021년) 정도밖에 안 되는 작은 도시이지만 독일뿐 아니라 유럽의 문학, 철학, 음악 등 분야에서 큰 발자국을 남긴 인물들이 이 도시에서 활약했거나 이 도시를 거쳐 갔다. 말 그대로 독일 문화의 중심이었던 이곳에 끔찍한 강제수용소가 세워졌다니---.
부헨발트 수용소는 바이마르 시내에서 시내버스로 닿을 수 있는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들녘은 노랑 하양 보라 등 각양각색 들꽃들이 만발해 있었고 초록은 완연했다. 하지만 큰 나무들은 아직 새싹을 틔우지 않고 있어 고목들은 죽은 듯 더 노쇠하고 쓸쓸해 보였다. 수용소 정문을 지나 들어선 전시장의 기록사진 가운데는 수용소가 해방되던 날 연합군이 찍은,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주검들 사진이 있었다. 하나같이 마른 나뭇가지처럼 말라 있어 질병이나 배고픔으로 죽어간 듯했다.
화장터 화덕 안에 놓인 추모객들이 가져다 놓은 장미들의 초록 잎과 붉은 꽃잎이 삶과 죽음을 말하는 것 같아 나는 잠시 환영에 빠지고 말았다. 화장터 기계 장치를 살펴보는데 주검을 화덕(오븐)에 넣고 잠그는 쇠뭉치 손잡이가 유독 눈에 들어왔다. 그때까지도 녹슬지 않고 반지르르했던 손잡이는 매우 간결하고 견고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수만 명을 화장하면서 여닫기를 셀 수 없이 반복했어도 여태껏 고장 나지 않고 있다니. 순간 섬뜩한 생각에 더 끔찍해 보였다.
또 다른 전시장에는 희생자 유품들이 나열돼 있었다. 나는 밥그릇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녹슬지 않는 양은 재질의 밥그릇들은 크기와 모양이 제각각이고 찌그러져 거칠어 보였어도 대체로 온전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가스실에 들어가기 전까지 저 밥그릇으로 밥을 먹고, 어딜 가나 꼭 챙겨 다녔을 것을 생각하니 밥의 위엄과 가치가 새삼 무겁게 느껴져 숙연해졌다. 밥을 먹는 것은 살아 있다는 것, 살 수 있다는 희망이었을 것이다.
밥그릇을 바라보노라니 강제수용소에서 생존한 한 소설가가 떠올랐다. 아우슈비츠와 이곳 부헨발트 등 수용소에서 수감됐다가 풀려난 뒤 생존 경험을 다룬 소설 <운명> 등으로 2002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헝가리 소설가 임레 케르테스다.
자극적이거나 선동적이지 않고 담담하게 써낸 책 <운명>에서 배고픔과 관련해 “강제수용소의 공장과 이송 도중 기차 안, 아우슈비츠와 부헨발트에서도 배가 고팠다. 온몸이 어떤 구멍이나 공간으로 바뀌어버린 듯했다.
(중략)
내가 나무나 쇠나 돌덩이를 먹지 않은 것은 오직 씹거나 소화시킬 수 없기 때문이었다. 모래는 먹어 본 적이 있다. 나는 풀을 보면 결코 망설이지 않았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곳 수용소에서 풀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았다”고 썼다.
수용소를 돌아보고 정문 쪽으로 나오는데 높고 커다란 화장터 굴뚝이 보였다. 굴뚝 꼭대기를 한참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먹구름이 몰려와 굴뚝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듯이 보였다. 총 6기 소각로에서는 하루 최대 400구 주검을 태웠다. 생존자들은 주검을 태우면 화장터 굴뚝에서 밤하늘에 불꽃이 튀어 오르고 심한 냄새가 난 뒤 나중에는 잿가루가 하늘을 뒤덮어 이리저리 날아다녔다고 증언했다.
뜨겁고 어두운 굴뚝으로 수많은 희생자의 영혼이 빠져나가는 상상의 환각에 더는 굴뚝을 바라볼 수 없었다. 1937~1945년 운영된 이곳 수용소에서는 5만6천여명이 학살됐다.] (2022년 6월 1일, 한겨레)
이 글을 그대로 옮기는 동안, 김봉규 기자의 마음이 전달됐다. 손이 떨렸다. 한 자 한 자가 한 영혼으로 조심스럽게 내게 왔다. 한 사람 한 사람씩 5만6천 번의 엄청난 범죄를 저지른 거다. 마음이 저렸다. ‘뜨겁고 어두운 굴뚝으로 수많은 희생자의 영혼이 빠져나가는’, 아니 이런 일을 저지른(르는, 를 수 있는) 인간이란.
글쓰기 컴퓨터 앞, 창밖으로 맞은편 아파트 옥상에 있는 배기관 굴뚝 윗부분이 보인다. 아래로는 보이질 않는다. 혹, 저 아래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모르게.
아래를 살폈다. 부헨발트 수용소 들녘이 초록으로 완연했듯 짙푸른 나무들이 보인다. 사람들이 걷고 있다. 수용소의 참상은 다른 행성의 일이다. 무심한 ‘내’가 걷고 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