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미지옥에서 헤엄치다

내가 가지고 있던 틀

by 스로

빨간색이 싫다. 하얀색 욕조 대신 빨간색 대야, 빨간 벽돌이 깔린 집 밖 푸세식 화장실. 식탁 대신 빨간 좌식 밥상. 나를 흙수저라고 느끼게 한 것들. 이보다 더 흙수저라 느끼게 했던 건 기와집 쪽문이다. 학창 시절 등교할 때 살짝 문을 열고 문 틈 사이 누가 지나가는지 지켜봤다. 터벅터벅 소리가 사라질 때까지 기다리다 문 밖을 나왔다. 쪽문을 나가는 모습을 애들이 보면 창피해 죽을 수 있다 생각했다. 그렇다고 집이 죽을 만큼 싫진 않았다. 내가 버틸 수 있을 만큼만 싫어했다. 남들이 부러운 순간이나 내가 못나 보일 때 책임을 던지는 나만의 쓰레기통으로 썼다.


초등학교 때 하루 용돈으로 오백 원을 받았다. 적다고 투정 부렸지만 많은 걸 했다. 하교 후에 문방구로 달려갔다. 잼이 들어있는 백원 짜리 호빵을 사서 양손으로 눌러 납작하게 만든다. 손바닥 길이 만한 소시지 하나를 전자레인지에 같이 돌린다. '띵' 하는 소리가 나면 잽싸게 빼서 햄버거처럼 만들고 한 입 베어 문다. 친구들은 그 햄버거도 모자라 양념 쥐포와 음료수까지 먹는다. 나도 사 먹을 순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남은 돈으로 오락실을 가야 했기 때문이다. 친구들은 저걸 다 사도 오락할 돈이 있지만 나는 아니었다. 용돈에 대한 열등감은 오락실로 가면 해소됐다. 오락실 게임을 곧 잘했는데 내가 삼백 원을 쓸 동안 애들은 천 원을 써야 했다. 정말 흙수저였다면 이런 열등감을 금수저로 만드는 재료로 써야 했다. 내 못남과 모든 실패에 책임 전가를 위해 흙수저라는 가짜 프레임을 만들어 안경처럼 쓰고 살았다. 공부를 못하는 이유, 특별한 재능이 없는 걸 흙수저로 태어나서라 합리화했다. 필요할 때마다 흙수저란 안경을 꺼내 나를 지켜냈다.


중학교부터 공부는 뒷전으로 하고 열심히 놀고 노래 불렀다. 노래를 재능 삼아 첫 대학을 갔지만 포기했다.

내 실력은 축구로 따지면 아마추어 9부 리그쯤 됐던 것 같다. 23살 조금 늦게 군대를 전역하고 많은 알바를 했다. 웨이터, 핸드폰 판매, 아웃바운드 보험 판매, 택배 상하차, 음식점 알바 안 해본 일이 없다. 24살 겨울, 고졸이란 틀을 벗어나고 싶었는지, 알바하는 내가 싫었는지 다음 해 전문대를 갔다. 고등학교 때 꼴등도 해본 내가 다시 공부를 한다는 건 큰 결심이었다. 여기서 인생 첫 번째 터닝 포인트를 만들었다. 누나가 학교 원무과에서 일했는데 누나를 창피하게 만들기 싫어 인생 처음 1등을 결심했다. 매일 에너지 드링크를 마시며 새벽까지 공부했고 첫 학기 과탑을 했다. 인생 처음 '나는 안돼'라는 틀에서 벗어나 생각한 대로 내 위치를 바꿔낸 기적의 순간이었다. 성취가 아까워 남은 학기 동안 상위권을 유지했고 높은 학점으로 졸업했다. 학생회장도 했고 자격증도 여러 개 땄다. 나름의 목표들을 이뤄 자신감이 생겼고 26살 졸업했다.


사회에 나가니 전문대 졸업자라는 새로운 틀이 생겼다. 회사를 지원하는 데 제한이 많았다. 우대사항이 아닌 필수조건에 떡하니 대학교 4년 졸업자라 쓰여있으면 지원은 해보지도 못했다. 그래도 어찌어찌 운 좋게 중견기업에 취직했다. 목에 건 사원증, 회사 이름이 박힌 명함. 놀기만 했던 학창 시절을 떠올려보면 과분할 정도였다. 그런데 전문대 졸업생이라는 이유로 2년이나 진급이 늦단다. 다행히 그땐 이 열등감을 틀을 깨는 망치 썼다. '전문대 졸업생이라 그런지 일을 못한다' 소리가 나오지 않게 열심히 했다. 남들보다 2년 느리면, 2년 빨리 진급하면 된다 다짐했다. 그 덕에 빨리 진급했다. 이대로 가면 인정받아 팀장도 하고 임원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살다 보면 그렇듯 너무 안정적인 삶이 싫었나 보다. 아니 내가 그런 성격인가 보다. 뭐든 할 수 있을 거란 생각에 다른 직종으로 이직을 했다. 이직을 하고서도 만족을 못해 주식에 손을 댔다. 예상하는 것 같이 빚쟁이란 개미지옥에 갇혔다.


흙수저 전문대 졸업자가 나름 인생 반전을 만들었지만 한 순간 빚쟁이가 됐다. 모아둔 돈은 물론 대출까지 당겨 받아 야무지게 망했고 빚쟁이란 새로운 틀을 만들었다. 이 정도면 틀 만들기 장인이 아닐까 싶다. 내가 가진 3개의 틀 중 흙수저라는 틀은 지워냈다. 자립할 힘이 없을 때까지만 쓸 수 있는 쓰레기통이었다. 전문대졸이라는 틀은 바꾸진 못한다. 그래도 경력 5년 차에 과장이 됐고 연봉도 오천이 넘으니 꽤나 잘 깬 것 같다. 흙수저, 전문대 졸업이란 개미지옥에서는 빠져나왔다. 이제 빚쟁이라는 개미지옥에서 벗어나야 한다. 빚에서 벗어나도 또 다른 개미지옥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지만 일단 발버둥 쳐 보려 한다. 내 발목을 잡고라도 탈출하고 싶은 당신을 위해서라도. 설령 내 발목을 놓쳐도 먼저 나가 손을 뻗고 기다리고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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