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고요한 시간이 되면 뇌리에 파고드는 기억의 조각들이 있다. 때로는 아프기도 하고, 때로는 감사와 행복으로 잔잔히 젖어들기도 한다. 가만히 보면 왜 지난날들은 아름다운 것들만 기억에 남아있는 것만 같다. 분명 그때는 아팠고 버거웠고 힘들었던 것 같은데 애써 기억하려 하지 않으면 그리 생각나지 않는 것은 아마도 인생이 강물처럼 흐르고 있는 것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죽는 날까지 성장은 멈추지 않는다고 하는가 보다.
멈춤 없이 변화하고 성장하게 하는 이 생각이라는 존재
얼마 전 고 이어령 선생이 돌아가시기 직전 쓰려고 했던 책에 대한 짧은 글을 읽었다. 더 이상 걸을 수 없었을 때 죽음의 두려움 앞에 한없이 울었던 그가 마지막으로 쓰려고 했던 글은 ‘눈물 한 방울’이었다고 했다. 그는 스무 페이지가량 글을 써 놓고 완성을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났다. ‘인생이 떠나면서 마지막에 할 수 있는 말이 무엇일까’라는 질문에 그는 ‘죽어봐야 알 것만 같다’고 했다. 솔직한 대답이다.
양 눈을 가지고 한 눈은 자신을 둘러싼 외부세계를 또 다른 한 눈으론 자신의 내면과 조우하며 우리는 끝없는 성장을 한다. 그러하기에 깊은 밤, 그리고 새벽이 되면 생각들이 각각의 위치로 가며 버릴 것들과 빨아 입을 것들을 분리하곤 마음을 새롭게 한다. 죽는 날까지 멈춤없는 이 변화와 성장 속에 결국은 인생의 실체를 남겨놓는 그 ‘생각이라는 존재’가 참으로 위대하다. 그리고 그 생각을 창조한 신은 실로 전능자가 맞다.
버거워서 눈을 뜨기 싫었던 이십 대
자유에 대한 갈급함으로 무작정 캐나다로 떠났던 이십 대의 나는 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피폐해 있었다. 무엇을 위해 그 젊은 날 몸부림치며 밤새 애를 태우며 그리 살았었나. 알기 위해, 그리고 알고 싶어서 속이 까맣게 타들어간 채 살았던 나의 10대와 20대의 삶이다. 한두 시간 잠을 청하면서도 내 존재를 알 수만 있다면, 왜 살아야 하는지 왜 존재해야 하는지 알 수만 있었다면 모든 것을 다 주어도 값을 치를 수 있겠다는 간절함이 밤새도록 나를 깨어있게 했고 기록하게 했다. 사랑하며 좋은 것만 나누기에도 바쁜 인생살이지만 치열한 경쟁과 알 수 없는 천층만층 구만 층 사람의 마음길 속에서 마음이 여리고 소심한 나는 상처를 인내하고 삭히고 또 삭히다 만신창이가 된 것만 같았다.
그러한 답답함이 포화상태에 이르렀을 때, 옷 한 벌 챙기지 못한 채 나는 비행기에 몸을 싣고 한국을 떠났다. 템즈강이 흐르는 캐나다 런던. 나는 노부부가 운영하는 병원이 딸린 주택에 세를 들었다. 근 석 달을 방에서 나오지 않고 잠만 자는 나를 노부부는 조심스레 다뤘다. 말도 행동도 모두... 사실 나는 잠을 잤다기보다는 눈을 뜨고 현실 세계를 마주하기가 싫었다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조금씩 깨어나기 시작했다
아주머니는 육십이 가까웠고 아저씨는 그 보다 일곱여덟 살 더 많으셨던 것 같다. 은퇴를 코 앞에 두고 있었다. 나는 잠깐씩 잠에서 깨면 뒷마당에서 책을 읽거나 멍하니 깊은 생각의 강에 빠져 있었다. 가끔은 집에서 힘겹게 악보를 따라 치는 피아노 소리와 거친 바이올린 소리가 흘러나왔다. 노부부의 집에는 그들이 키우는 골든 리트리버 Shamus, 그리고 내가 살고 있었다. 고요하기 그지없는 집은 아주머니가 즐겨보는 오프라윈프리 쇼 방송이 있을 때나 아저씨가 악기를 다룰 때나 사람 사는 집 같았다. 어떤 날은 보타이에 슈트를 입은 노신사가 슈타인웨이 그랜드피아노 앞에 앉아 피아노를 칠 때도 있었다. 노신사는 정기적으로 집에 방문을 했다.
계속 잠만 자고 있을 수는 없었다. 슈타인웨이는 소리가 너무도 아름다웠다. 깊고 맑았다. 영혼을 온통 뒤집어서 깨끗하게 씻겨주는 것만 같았다. 고요함이 흐르는 이른 아침, 무언가에 홀린 듯 조용히 피아노 앞으로 가서 건반을 눌러본다. 솟구치듯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깊은 잠에서 깨어나 세상에서 처음 들어본 소리인 양 나는 그 음색과 파동까지 뇌에 새기고 있었다. 영혼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건반의 언어로 옮겨내었고, 그렇게 무언가에 억눌리고 매어있던 나는 조금씩 구속에서 풀려나오는 듯했다.
업라이트 피아노를 쓰시는 아저씨는 ‘all yours!‘라는 말을 하시며 슈타인웨이를 내게 내주셨다. 수억대가 넘는 고가의 악기였다. 아저씨는 거기에 더해 의문의 노신사를 내게 소개해주셨다. 존슨 선생님이셨다. 그는 90세의 아름다운 노신사였다. 캐나다 국립음악원에 계셨다가 10대에 사고를 당한 이후 평생을 개인레슨으로 피아니스트의 삶을 살고 있다고 하셨다.
아저씨도 아팠었다
아저씨는 정형외과 전문의였지만 무엇보다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질 줄 아는 의사였다. 마을 주민들은 이런 아저씨는 존경했고, 아저씨는 가진 것을 나눌 줄 아는 분이었다. 가난한 이민자부터 형편이 녹록지 않는 환자들에게 그는 늘 무상으로 진료를 했고 그 덕분에 아주머니와는 크고 작은 다툼들이 있었지만 아저씨는 그 싸움에서 결코 밀리는 법은 없었다.
나는 그런 아저씨가 참 존경스러웠다. 아저씨는 내가 세 들어오기 바로 직전 해까지 병원을 수 년동안 닫았다고 하셨다. 집 근처 호수로 차를 몰고 가셨단다. 우울증으로 시달리신 아저씨는 병원 문을 닫고 치료를 오랜 시간 받으셨다고 했다. 아파본 사람이 아픈 사람을 알아본다는 것이 맞았다.
아저씨는 존슨 선생님을 내게 소개하시며 레슨비를 대신 내주셨다. 아저씨의 논리는 이러했다. 존슨선생님은 런던에서 두 시간 정도 떨어진 웨스트 민스터에서 운전을 해 오시는데도 레슨비만 받고 교통비를 받으려 하지 않으셔서 마음이 불편했다는 것이다. 존슨 선생님께 사례를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에 내가 레슨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 모든 것이 사랑이었다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기도 했지만 피아노를 다시 하고 싶은 열망이 깊었다.
어설픈 실력이지만 누구에게 평가받기 위해서가 아닌 내 느낌을 나는 곡으로 옮겼고, 존슨 선생님은 말없이 들어주셨다.
”It’s very beautiful... beautiful! Look, I woke up early this morning, and I wrote this... Isn‘t it beautiful? “
선생님은 쓰신 곡들을 눈을 감고 잔잔히 그리고 부드러운 선율로 들려주셨다.
선생님은 영혼으로 피아노를 연주하셨다.
월요일 오후 3시. 우리가 만나는 시간이다. 햇살이 창가 커튼 사이로 번져오고, 노신사의 감은 두 눈과 얼굴에 퍼진 평온함은 슈타인웨이 소리와 완전히 일체 되었다. 눈가가 촉촉해진 선생님의 깊고 빛나는 눈망울이 지는 노을처럼 아름다웠다. 그 순간만큼은 시간이 멈춘 듯 온 세상에 우리만 있는 듯했다.
지금도 존슨 선생님의 음성이 들려오는 듯하다.
‘Listen! Isn’t it beautiful..?‘
아저씨의 배려로 나는 존슨 선생님의 건강이 허락되는 범주내에서 1년여 시간 이상을 무상으로 레슨을 받을 수 있었고, 아저씨는 대신 아침마다 내게 피아노를 치도록 했다. 그것이 나의 레슨비였다.
20년도 훨씬 지난 과거다.
아저씨도 존슨 선생님도 아팠었다. 그래서 그 사랑이 나를 치유케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한 기억의 한 편이 마치 샘에서 물을 길어 오르듯 영혼을 충만하게 한다.
노부부 그리고 존슨 선생님께 받은 사랑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 생면부지의 그들을 만나게 했고, 피폐하고 남루해진 영혼을 치유케 해주신 창조주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지나고 보면 그 모든 것이 사랑이었음을 진실로 고백한다. 그리고 지금도 그 사랑의 강이 흘러 나를 감싸고 있음을 나는 오늘 존재함으로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