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치않는 사랑이란 처음 사랑에 빠진 순간과 똑같이 유지되는 사랑이 아니다
얼마 전 친구가 소개팅에 갔다가 사랑에 빠져 돌아왔다. 소개팅 내내 별 감흥이 없었는데, 저녁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그 사람이 “혹시 괜찮다면, 내리는 전철역까지 데려다줘도 될까요?” 하고 물었단다. 엥? 그게 뭐? 친구는 ‘집 앞’도 아니고 ‘내리는 전철역’을 언급한 것은 사는 곳을 알리기 싫을 수도 있는 여자의 마음을 배려한 것이며, 막무가내로 “데려다주겠다”고 하지 않고 선택권을 제시한 것에 센스를 느꼈다고 했다.
하지만 핵심은 “혹시 괜찮다면”이라는 표현이었다고. 너무 귀엽지 않냐는 친구의 질문에 그저 웃었다. 사랑에 빠지는 건 대개 어떤 ‘순간’이다. 그 사람의 표정이나 눈빛일 수도 있고, 인상 깊은 한마디 말일 수도 있다. 그것들은 사소해서 더 의미심장하다.
나는 화장실에서 급히 물세수를 하고 나온 모습에 반한 적도 있다. 하얀 피부와 검은 머리칼에서 방울방울 떨어지는 물기, 그리고 쑥쓰러운 표정으로 입고 있는 빨간 티셔츠에 손을 문지르던 순간. 누군가 들으면 비웃을 수도 있겠지만 아마도 거기서 나는 순진함, 맑음, 천진함 같은 것을 떠올렸을 것이다.
결국 첫눈에 반하는 일은 비합리적인 일일 수밖에 없다. 밀란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토마시가 테레자에게 사랑을 느낀 것도 그녀를 ‘송진으로 방수된 바구니에 넣어져 강물에 버려진 아이’라 느꼈기 때문이다. 작가는 말한다. “사랑은 단 하나의 은유에서도 생겨날 수 있다.”
얼마나 낭만적인지! 하지만 사랑에 빠지게 만들었던 그 모습만 믿다가는 큰 코 다칠 수 있다. 첫눈에 반했던 순간을 지속하고자 하는 욕심이 오히려 연애를 방해하기도 한다. 나와 내 남편은 대학교 졸업을 앞두고 연인이 되었다(앞서, 물세수 따위로 순진해 보였던 바로 그 애). 같은 학교 같은 전공에, 종일 붙어 있었기 때문에 서로를 정말 잘 안다고 믿었다. 하지만 취업을 준비하면서 우리의 일상은 조금씩 변했다.
각자 고군분투할 시간이 필요했고, 면접이 한참 진행될 때는 마음의 여유가 없어지기도 했다. 연애를 막 시작했을 때는 서로의 아이 같은 면을 발견하고 즐거워했던 우리였는데, 정신 차려보니 어설픈 어른이 되느라 처음의 모습을 잃어버린 것만 같았다. 주변의 커플들도 취업 시즌을 겪으면서 삐그덕 대는 것이 보였다.
한 사람이 먼저 취업했을 때, 한 사람이 공무원 시험에 매진했을 때, 한 사람이 야근이 많은 회사에 들어가게 됐을 때…. 상황이 변하면서 이전과 같은 연애 스타일을 지속할 수 없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이별을 택했다. 그 사람들이 사랑에 빠졌던 순간의 그 마법은 어디로 간 걸까?
여자친구를 마냥 귀여워만 하던 한 친구는, 그녀가 자신보다 연봉이 더 높은 기업에 들어가자 혼란스러워했다. 그를 사랑에 빠지게 만들었던 ‘귀여운 여자친구’라는 이미지가, 그리고 그간의 연애 패턴(여자친구는 응석을 부리고 자신은 받아주는)이 오히려 그들의 헤어짐을 부추기는 것 같아 보였다. 이참에 너도 좀 귀여움을 받아보는 건 어때? 농담처럼 말했지만, 친구는 웃지 않았다.
하지만 세상 누구도 그저 귀엽기만 하거나, 순진하기만 하거나, 듬직하기만 하거나, 배려 깊기만 하지 않다. 우리 자신이 착하기도 나쁘기도 꼼꼼하기도 덜렁거리기도 똑똑하기도 바보 같기도 한 것처럼, 상대도 마찬가지다.
다시 나와 내 남편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면, 우리가 처음 만난 건 10여 년 전인 2009년이다. 이제는 처음 반했던 순간이 가물가물할 정도이며, 그 모습이 딱히 중요하지도 않다. 남편이 갑작스레 이직을 준비하며 혼란스러워했을 때, 내가 짧은 기간 우울증을 겪었을 때 등등 각자가 흔들리며 평상심을 유지할 수 없게 되면 ‘이 사람이 내가 알던 사람이 맞나’ 싶은 순간도 생긴다는 걸 이젠 알기 때문이다. 나는 남편의 순진하고 안정적인 면을 좋아하지만 그에게도 분명 그렇지 못한 순간이 있고, 남편은 나를 (아마도) 귀엽고 총명하다고 생각해주는 것 같지만 나도 못나고 멍청해지는 때가 있다.
한 사람과 10여 년을 지내보니 사랑에 ‘빠지는’ 것과 사랑을 ‘지속하는’ 것이 얼마나 다른 종류의 일인지 깨닫게 됐다. 어릴 때는 연애를 지속하기 위해 애쓰는 것이 ‘진짜 사랑’을 배반하는 행위라고 생각했다. 지속하기 위해 애써야 한다면 그게 어떻게 사랑이야? 그렇게 사랑의 정열적인 면만을 믿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때의 내가 틀렸다는 걸 안다.
사랑을 지속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없는 마음을 만들기 위해 애쓰는 것과는 다르다.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변해가는 상대에 맞춰 나의 연애 패턴이나 사랑의 표현 방식을 바꿔주는 것. 상대 또한 변하는 나에게 맞춰줄 수 있게 충분히 대화하고 이해시키는 것. 사랑이 계속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일들이다.
그러니까, 변치 않는 사랑이란 처음 사랑에 빠진 순간과 똑같이 유지되는 사랑이 아니다. 시간에 따라 변하는 두 사람에게 맞춰서 모습을 바꿔가는 사랑만이 변치 않을 수 있다. 변해야만 변치 않을 수 있다니. 아무리 많은 시간이 지나도 늘 어려울 것 같다, 사랑은.
Illustrator 키미앤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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