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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여산 Oct 17. 2022

‘함께’가 나에게 남긴 것


제주살이에서 예상치 못한 매력 중 하나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는 것이다. 생각보다 오랜 시간 이곳에 머물게 되면서, 나는 본의 아니게 여러 스탭들을 만나고 또 보냈다. 나처럼 향후 진로가 정해져서 오는 사람들은 흔치 않기 때문에 다른 스탭들은 짧게는 한 달, 길게는 네 달 정도 있다가 육지로 떠난다. 우리는 보통 “현생을 살러 간다”라고 말한다. 취업 준비나 이직처럼 제주에 오느라 잠시 멈춰두었던 삶을 다시 시작하러 가는 것이다. 그 빈자리를 또 새로운 사람이 채워가면서, 나는 지금까지 6명 정도의 스탭들을 만났다.




멤버들이 가끔 바뀌긴 해도 스탭 숙소에는 나를 포함해 총 세 명의 여자 스탭들이 함께 지낸다. 룸메이트와 둘이 사는 기숙사 생활은 해본 적이 있었지만, 둘이 사는 것과 셋이 사는 건 그 목소리의 크기부터가 다르다. 둘이 이야기하다가도, 다른 한 사람이 던지는 농담 하나에 와하하 웃기도 하고, 깜깜한 제주도의 밤길도 둘 보다 셋이 걸으면 뭔가 더 든든하다. 그렇게 비슷한 또래의 사람들끼리 거의 온종일을 함께 지내다 보면, 자연스럽게 서로의 일상을 공유한다. 식성이나 취향은 물론이고, 잠버릇이나 혼잣말 같은 사소한 것들까지.




5월에 처음 만난 혜성이는 손으로 이것저것 만드는 것을 좋아했다. 그녀가 가진 빨간 철제 상자에는 갖가지 크기와 색깔의 비즈들과, 낚싯줄, 고리 같은 것들이 들어 있었다. 혜성은 1층 카페에 몇 시간이고 앉아 비즈 반지를 만들었다. 색깔을 바꿔가며 무늬를 넣기도 하고, 실을 이리저리 꼬아 꽃 모양을 만들기도 했다. 나도 그 옆에 앉아 그녀를 따라 비즈 구슬을 꿰었다. 그리고 어느 날은 내가 만든 반지를, 또 어떤 날은 그녀가 선물해준 반지를 끼고 집을 나섰다.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가면서 내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내가 계속 혼자였다면 이런 걸 만들 일이나 있었을까, 생각했다.




나는 많은 시간을 혼자였다. 혼자 지내는 생활이 잘 맞는다고 느꼈다. 하루 공부가 모두 끝나고 나면 지칠 때까지 밤길을 산책하는 일도, 서점에 가고 카페에 가서 책을 읽거나 커피를 마시는 일도 혼자였다. 혼자가 편했다. 혼자 있으면 누군가의 말에 상처받을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내가 무심코 던진 말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까 긴장하지 않아도 되었다. 조금은 단조롭긴 하지만 흔들림이 없으니 이게 나에겐 평화로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혼자 생활하는 것이 나에게 기본값이 된 것은 환경적인 요인도 컸다. 2019년에 휴학을 하면서 친한 사람 하나 없는 본가(정확히는 부모님 집)에 살다 보니 자연스럽게 보내는 시간이 길어졌고, 3개월간의 유럽 배낭여행도 나 홀로 떠나면서 혼자 놀기의 달인이 되었다. 복학해서 친구들 좀 만나면 되겠지 했는데, 임용고시 공부와 함께 코로나 사태가 닥쳤다. 친구는 고사하고 수업 한 번 대면으로 듣지 못하고 졸업했다. 그런 시간이 오래 지나니 혼자 지내는 것이 내 모습이고 취향인 줄 알았다. 이렇게 계속해서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지금은 별다른 접점이 없는 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다. 점심때가 되면 한 명씩 나와서 냉장고에 있는 식재료들을 뒤적거린다. 오늘 뭐 먹지, 하면 누군가 ‘저번에 삼겹살 남은 거 간단하게 구워 먹지 뭐’ 말한다. 한 사람이 고기를 구우면, 다른 사람이 된장찌개를 끓인다. 냉장고에서 남은 깻잎을 찾은 누군가는 야채를 씻는다. 그렇게 누가 시키지 않아도 각자 하나씩 도맡는다. 그러다 보면 ‘그냥 간단하게~’로 시작했던 처음과는 다르게, 여러 개의 접시가 식탁에 올라온다.




밥을 먹기 전엔 의식처럼 사진을 찍고, 서로의 솜씨에 감탄하며 식사를 한다. 분명 작년 이맘때에는 김밥 한 줄, 요거트 볼 한 그릇처럼 최대한 한 그릇에 담기는 식사를 해 먹곤 했는데, 지금은 내가 생각하지도 못했던 멋진 음식들이 식탁에 올라온다. 여기 오래 머물렀던 사람으로서 재미있는 건, 같이 지내는 스탭들은 바뀌어도 항상 식사 시간이 되면 이 말은 꼭 나온다는 거다.  




“진짜 우리 잘 해먹는 것 같아.”




그렇게 나는 내가 못 먹는 줄만 알았던 불닭볶음면을 꽤나 맛있게 먹을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싫어하는 줄만 알았던 하이볼도 맛있는 음식과 함께 곁들여 먹으면 세상 그만한 술이 없다는 걸 알았다.





여행을 가면 내가 몰랐던 나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나는 제주 살이에서, 다른 사람들의 취향과 흔적에 조금씩 물들어가는 나를 발견했다. 네가 좋아하는 음식을 나도 먹어보고, 네가 좋아하는 향수를 나도 좋아하게 된다. '빈티지 감성이야 어플로 내면 되는 거 아니야’하던 내가 이젠 널 떠올리며 여행길에 필름 카메라를 챙긴다. “다음엔 우리 같이 가보자”하고 예전에는 하기 어려웠던 말도 건넨다. 이번에는 우리 사이의 침묵도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을 것만 같은 용기가 생긴다. 그렇게 나는 조금 다채로워진 내 모습이 마음에 든다. 다른 누군가와 함께라는 게 그렇게 상처받기만 하는 일도 아니라는 걸 어렵게, 어렵게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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