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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여산 Oct 18. 2022

세상에 이런 우연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난 사람들


내 MBTI는 INFJ다. 여기서 주목할 글자는 N인데, 아무리 비현실적인 일이라도 마음껏 상상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갑자기 교실에서 폭탄이 터지면 어디로 대피할 것인지 고민한 적은 없어도, 오늘 입실하는 사람들 중에 5년 넘게 만났던 전남친이 오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은 자주 했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는데 설마 내가 아는 그 얼굴이라면. 혹시라도 눈이 마주쳐서 들어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면서 서로 동공 지진이 일어난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면 뭐야 하며 웃어 보이곤 하지만 막상 당사자는 진지했다. 여러 경우의 수를 생각하며 고민 고민하던 나는 결국 매니저 언니에게 신신당부했다.



"언니, 혹시 그런 일이 생기면 저는 냅다 도망칠 테니 입실 안내만 대신 해주세요."



매니저 언니는 웃으며 알겠다고 대답했다.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는 N인데다가 계획형인 J이기까지 한 나는 전남친이 들어왔을 때 어떤 경로로 도망칠 것인지 계획을 세우다가 결국 그만두었다.



'에이, 설마 그런 일이 일어나겠어' 하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나 역시 그러기를 간절히 바라는 바지만 그래도 여기는 게스트하우스다. 매일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찾아오는 게스트하우스. 방심하고 있다 보면 뜻밖의 인연이 이곳을 찾아온다. 내가 입실 안내를 하는 날의 일이었다. 어떤 여자분이 문을 열더니 그대로 굳어서는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체크인하시나요?”



내가 물었다. 토끼눈을 한 그 여자는 나에게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왔다. 마스크로 하관을 가려서 얼굴을 바로 알아볼 수 없었지만, 까만 단발머리에 동그란 눈이 점점 익숙해졌다.



“언니가 왜 여기 있어?”



어라, 지희였다. 그것도 몇 년 전 유럽 여행에서 만난 지희. 몇 해 전 6월, 우리는 프라하에서 처음 만났다. 그때 지희가 입었던 노란색 꽃무늬 원피스를 아직도 기억한다. 우리는 함께 재즈 카페에 가고 저녁을 먹으며 체코의 흑맥주가 얼마나 맛있는지 열변을 토했다. 며칠이 지나 체코의 소도시인 체스키에서 지희를 다시 만났다. 그것도 같은 숙소, 같은 도미토리룸에서. 우리는 프라하에서처럼, 체스키에서도 함께 여행했다. 작은 도시를 산책하고, 해가 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눴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계속 만나며 인연을 이어갔다. 지희는 어느 나라 어느 도시에서든 한결같은 웃음으로 나를 대해주던 사람이었다.



우리는 소리를 지르며 서로를 부둥켜안았다. 진짜 영화 같다며  번을 감탄했다. 지나치게 많은 사람들이 있는 세상이지만 가끔 이렇게 기분 좋은 마주침이 생기곤 한다.   게스트하우스는 모든 만남과 우연의 집합체다. 세상의 어떤 흐름과   없는 타이밍 같은 것들에 의해 하필 그날 그때  사람이 이곳의 문을 연다.



오늘 어떤 사람이 찾아올지, 그 사람들이 모여 어떤 밤을 만들어낼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어제의 게스트들은 떠나고 매일매일 새로운 게스트들로 새롭게 하루가 시작된다. 게하 스탭 일이 때때로 불안하기도 하지만 기대되기도 하는 이유다. 처음에는 점잖게 이야기하다 나중에는 식탁이 떠나가라 소리 지르며 욕을 하는 사람이 올 수도 있고, 다른 게스트들에게 직접 구운 쿠키를 나누어주는 사람이 올 수도 있다. 몇 년 전 여행길에서 만난 사람을 오늘 다시 만나기도 하고, 평소에는 절대 만나지 못했을 수도 있는 사람들이 내 일상에 오래도록 남아있기도 한다.



우리 엄마 뻘되는 여자 게스트분이 있었다. 잊을만하면 한 번씩 오시는 분인데, 중년 여성 특유의 따뜻함이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아침이 되면 꽃무늬 원피스나 등산복처럼 때에 따라 적당한 옷차림을 입고 게스트하우스를 나선다. 어느 날은 제주에 사는 친구와 함께 산책을 다녀오고, 어느 날은 딸기가 철이라며 딸기 한 상자를 스태프들에게 선물해주셨다. 밤이 되면 꼬질이 옆에 앉아 한참을 쓰다듬다가 다른 게스트들과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젊은이들의 숨을 턱턱 막히게 하는 명절 어른들과의 스몰 톡이 아니라 그날의 제주도 여행이나 꼬질이가 주된 이야깃거리다. 그 누구도 불편하거나 어렵지 않은 대화는 오랜만이었다. 우리 엄마도 저렇게 지냈으면 좋겠어, 같이 지내던 스탭이 말했다. 내가 저렇게 늙었으면 좋겠어, 내가 말했다.



가끔 게스트들은 다른 날도 아닌 오늘, 이 자리에 우리들이 모인 것이 얼마나 멋진 일인지 말한다. 처음에는 그게 그렇게 대단한 일인가 싶었지만 지금은 아주 틀린 말 같지는 않다. 인연이란 시작부터가 타이밍의 도움이 필요하니까. 서로 아주 잘 맞을 법한 사람도 오늘이 아니라 내일 이곳에 왔다면 앞으로도 평생 모르는 사이로 남을 것이다. 그저께가 아니라 어제 퇴사를 했다면 만나지 못했을 사람들이, 네이버 스크롤을 조금만 더 내렸다면 그냥 지나쳐갔을 게스트하우스에 모인 것이다.



인연이란 참 묘하다. 칼 같이 단번에 끊어내는 관계도 있는 반면, 파도처럼 내가 노력하지 않아도 나에게 밀려오는 관계도 있다. 오랜 시간 함께 했더라도 모래사장의 낙서처럼 감쪽같이 쓸려나가는 관계가 있는 반면, 겨우 몇 마디 주고받았을 뿐인데 오래도록 마음에 기분 좋은 여운을 남기는 관계도 있다. 지난해 나는 인간관계가 얼마나 덧없이 사라지는지 배웠다. 5년 넘게 함께 한 전 애인과 끝이 나는 건 단 며칠이면 충분했다. 나를 장작 삼아 불태우면 이 관계가 오래도록 따뜻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그건 내 착각이었다. 그래서 계속 확인했다. 이게 정말 끊어진 게 맞나. 이게 현실이 맞나.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헤어짐에도 아무런 징조가 없듯, 만남에도 아무 징조가 없다. 저 멀리 프라하에서 보았던 사람을 제주에서 다시 만난 것처럼, 어떤 인연은 돌고 돌아 어느 날 문득 나에게로 찾아온다. 좋은 인연은 아무런 전조 없이 찾아와 마치 오래전부터 알았던 것처럼 따스함을 남긴다. 작년의 나에게, 사람과 사람 사이 관계라는 건 불친절하고 또 허무한 것이었다. 지금은 혼자 되뇐다. 인연이란 게 참 알다가도 모르겠다고.



어제의 게스트들이 모두 퇴실하고 이른 오후의 햇살이 들어오는 지금, 나는 게스트하우스 1층 카페에 앉아 이 글을 쓰고 있다. 조금 뒤 다섯 시가 되면 어제의 게스트들은 모두 잊혀지고 새로운 게스트들이 찾아온다. 나는 다시 처음처럼 그들을 맞을 것이다. 오늘은 또 어떤 사람들이 찾아올까. 어떤 우연의 끈에 이끌려 육지에서의 지인을 다시 만나게 될까. 아니면 새로운 사람이 문을 두드릴까. 오늘도 참 사람 인연이라는 게 알 수 없다며 혼자 되뇌게 되지 않을까. 나는 그렇게 다섯 시를 기다린다.





(덧) 그리고 이 글을 완성한 날, 우리 게하에서 또 제 대학 동기를 만났습니다. 서로 “어 뭐야 니가 왜 여기 있어” 하며 신기해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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