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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시, 변곡점에 서 있습니다

by 한나

#1

끊임없는 변덕 때문에, 입체적이다 못해 다면? 적인 나는, 24년 겨울 따뜻한 사람들의 응원으로 문예창작과 대학원에 합격했다. 글 쓰는 게 참 좋았다. 마치 글을 쓰기 위해 39년을 살아온 사람처럼 쓰고 쓰고 또 썼다. 머릿속에서 쉬지 않고 흘러나온 글감들은 나를 재촉했다.

십 수달의 시간에 걸려 마음에 묻어두었던 작은 생채기까지 글감이 되어 내 밖으로 빠져나갔다. 글에게 많은 것을 빚졌다. 나란 사람을 통째로 하나 더 꺼내 쏟아놓은 것 같다. 덕분에 나는 치히로의 목욕탕에 다녀온 것처럼 사뿐해졌다. 매일매일 조금씩 비워냈다. 까만색 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내 그림자는 그렇게 내게 떨어져 나가 두 권의 책이 되었다.


#2

오랜 시간 글을 쏟아내고 나니, 마치 고해성사를 한 것 같이 마음이 후련해졌다. 글감이 줄었지만 나는 그늘진 곳에서 양지로 나왔다. 어렵게 지나온 모든 일들이 별것 아닌 일처럼 느껴졌다. 마치 남의 일인 것처럼.

글이란 그런 것이다. 나를 살리는 것. 꾸역꾸역 들어간 동굴에서 날 꺼내주는 누군가의 손.


#3

누구에게나 사랑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갖는 것은 강박이다. 부모님조차도 오롯이 주지 못한 사랑을 남이라고 나에게 줄까. 나 자신조차도 나를 온전히 사랑하지 못하는 것을.

아직도 사랑에 대해 배운다. 사랑을 하는 주체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랑을 하며 울고 웃는다. 구원자에 대한 바보 같은 환상에서 겨우겨우 벗어나본다.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 이상으로 그 누구도 나를 사랑해 줄 수 없다는 사실을 안다. 숟가락으로 내 가슴팍을 파면서 자학을 하고, 한편으로는 온전한 사랑을 구걸하는 꼴이라니. 그동안 미련했다고 미안하다고, 스스로에게 용서를 구해본다.

그대들에게 덜 기대하고, 말을 아끼고, 먼저 앞서나가지 않아보려 한다.


#4

그리하여 나는 매일 조금씩 어른이 되어가고 있다.

어른이 된다는 건, 거창한 무언가를 이뤄내는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하루를 버티고, 잠들고, 다시 눈뜨는 일을 반복하는 것. 별일 아닌 일들 앞에서 너무 오래 주저앉지 않는 것. 때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 웃고, 또 때로는 울어도 되는 일.


나는 여전히 미숙하고 모자라지만, 그 모자람을 감추려 애쓰기보다 그냥 끌어안는 쪽을 선택하려 한다.

그렇게 조금 허술하게 살아도 괜찮다는 걸, 삶이 조금씩 가르쳐주었다. 그래서인지 어른이 되어간다는 건 완성에 가까워지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덜 완벽해져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목소리를 자기 안에서 찾아내는 과정인 것이다.

그리고 그 목소리에 귀 기울일 때, 나는 비로소 내 편이 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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