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받을 만한 사람다운
언제부터였는지 짐작조차 하기 어려울 만큼 까마득한 어린 시절, 당시의 기준으로도 좋지 않았던 형편 탓에 단칸방에 온 가족이 나란히 누워 잠을 청하던 때가 있었다. 둘째이자 막내였던 다운은 그중에서도 엄마 옆에서 자는 것을 좋아했다. 미숙은 유난히 몸에 열이 많은 사람이었다. 다운이 늘 그녀의 곁에서 잠을 청한 것이 유난히 차가운 자신의 살갗을 데우기 위해서였는지, 만성적으로 결핍된 심중을 어떻게든 채우기 위해서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그때의 버릇으로 지금까지도 베개를 끼지 않고서는 잠을 청하지 못 하는 그였다.
지금과 달리 세기말에는 새로운 정보를 접할 창구가 다양하지 않았으므로 아이들은 물론 어른들도 TV를 통해 대부분의 상식을 습득했다. 그러므로 짐작하건대 다운이 올바르게 숨 쉬는 방법을 알게 된 것은 어느 TV 프로그램을 통해서였을 것이다. 어떤 맥락에서 언급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곁에서 잠을 자는 이와 자신의 들숨과 날숨을 맞추면 상대가 숙면을 취할 수 있다는 얘기였다. 그날 이후 밤마다 다운은 대부분 먼저 잠이 들곤 했던 자신의 엄마와 똑같이 숨을 쉬었다. 들이마실 때 들이마시고, 내쉴 때 내쉬었다. 아이들은 대개 어른보다 빠르게 호흡하기 마련이라 처음에는 숨이 찼다. 올바른 수준만큼 길게 들이마시고 길게 내쉬기에 다운은 너무 어렸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밤은 매일 찾아오고, 누구나 매일 밤이면 잠을 자야 했다. 그래서 매일 연습할 수 있었다. 이불 속 다운의 숨소리가 점차 정답에 가까워질수록 정작 그 자신의 숨소리는 희미해져 갔다. 아무도 모르는, 오직 자신만이 알 수 있는 잠들기 전 잠깐의 시간마저 다운은 자신이 사랑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높이는 데에 썼다. 그 시간은 영영 다운을 떠나 다시는 되돌아오지 않았다. 그렇게 자신의 호흡과 자신의 숨소리를 잃어버리고도 잃어버린 줄 몰랐다. 숨 쉬듯 자연스럽게, 그 상실은 날마다 조금씩 그 삶을 잠식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