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원을 맴도는 아이들
요즘 어린 아이들은 태권도 학원에서 대신 키워준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그만큼 하원, 하교 후에 태권도 학원을 다니는 아이들이 많다는 뜻이다. 태권도 학원뿐만 아니라 피아노, 미술, 수영, 발레 같은 예체능 계열의 학원이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으며, 더 나아가 국어 영어 수학 등 교과목을 배우는 학원에도 아이들이 북적인다. 이러니 언제부턴가 학원을 하나도 다니지 않는 아이가 드문 세상이 되어버렸다.
부모가 어린 자녀를 학원에 보내는 이유는 무엇일까? 조기 교육을 위한 이유도 있겠지만, 우선적으로 하교 후에 아이가 안전하게 있어야 할 공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나라 초등학생의 하교시간은 저학년의 경우 1시 50분, 고학년의 경우 2시 40분이다. 심지어 저학년 중에서도 가장 어린 1학년은 12시 30분에 하교하는 날도 있다. 하교 시간이 이렇게 이르다 보니 맞벌이 부모들은 하교시간부터 퇴근시간까지 자녀를 집에 두기가 불안하다. 그래서 최대한 늦게까지 아이를 봐줄 수 있는 학원에 자녀를 맡겨놓는다. 그런데 한 학원에만 오래 머물 순 없으니 아이가 여러 학원을 요일, 시간별로 번갈아 다니게하는 이른바 ‘학원 뺑뺑이’를 돌리는게 부모들 사이에서 흔히 행해지고 있다.
물론 학교에서 운영하는 방과 후 학습이라는 대안이 있긴 하다. 방과 후 학습까지 받게 되면 적은 비용으로 아이의 하교시간을 조금이나마 늦출 수 있으니 아주 좋은 대안이다. 하지만 방과 후 수업은 신청할 수 있는 과목과 인원의 제한이 있기 때문에 경쟁률이 치열하다. 운 좋게 방과 후 학습 신청이 되더라도 수업이 아무리 늦게 끝나봐야 4시라서 보통 직장인의 퇴근시간이 7시 전후인 것을 생각해 보면 그리 늦은 시간도 아니다. 그러면 아이가 방과 후 학습 후 하교한다해도 부모가 집에 오기까지 시간이 빈다. 그러니 방과 후 수업을 마친 아이들은 2-3시간 정도를 때우기 위해 또 다른 학원으로 향하기도 한다.
학원에 관해서 특수학교에 근무했을 때 만난 직장 동료 A의 이야기를 예시로 들겠다. 당시 내가 속한 부서에서 회식을 한 적이 있는데 A는 동료들에게 양해를 구한 뒤 회식 장소에 초등학생, 유치원생 자녀들을 데리고 왔다. 남편은 집에 늦게 들어오고 그렇다고 오랜만에 하는 회식인데 빠질 수는 없으니 결국 아이들을 회식장소에 데려온 것인데, 그때 그녀가 아이들이 듣지 못하도록 조용히 푸념했다. 태권도 학원이 없었으면 정말 큰일 날 뻔했다고. 그렇게 말할 때 그녀의 얼굴은 상당히 지쳐 보였다. 타 직장에 비해 특수학교 교직원들의 퇴근시간이 이른 편임에도 불구하고 어린 자녀들만 집에 두는 게 불안했던 그녀는 태권도 학원이 없었다면 아이들을 어떻게 키웠을지 상상도 되지 않는다며 한숨을 쉬었었다.
이번엔 어린이집에서 근무할 때 만난 장애 아동의 어머니 B의 이야기를 해보겠다. B의 자녀는 특수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었는데 B는 자녀가 입학하면 직장을 그만둘 생각이라고 내게 말했다. 나는 특수학교에 근무했던 경험이 있기 때문에 그녀에게 종일반을 신청해 보는 게 어떻겠냐고 권했지만, 그녀는 종일반에 신청하더라도 자격요건을 충족하지 못하면 선정이 되지 않으니 신청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고 했다. 종일반 학생을 선정하는 기준은 보통 1. 저소득층이면서 맞벌이 가정, 2. 저소득층 가정, 3. 맞벌이 가정, 4. 일반 가정 순이다. 그러니 일반 맞벌이 가정은 종일반을 신청한다 해도 이미 앞 순위에서 경쟁률이 워낙 높기 때문에 선정될 가능성이 거의 없는 것이다. 친부모나 시부모께 아이 양육을 부탁할 여건도 되지 않았던 그녀는 결국 자신이 직장을 그만둬야하는 것이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장애 아동은 예체능이나 교과목 학원에 다니는 것도 현실적으로 어렵다. 특수학교 저학년도 일반학교와 마찬가지로 하교시간이 이르기 때문에 자녀를 케어해 줄 사람이 없다면 부모 중 한 명이 직장을 그만둘 수밖에 없는 처지다. 이처럼 이른 하교 시간은 아이들에게 학교로부터 자유로운 해방 이겠지만, 부모에게는 짊어져야 할 무거운 족쇄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그런데 과연 초등학생만 학원에 다닐까? 요즘 어린이집 하원 후에 바로 태권도 학원이나 발레 학원에 가는 아이들도 드물지 않게 존재한다. 하원시간이 되면 노란색 버스가 어린이집 앞에 멈춰 서고, 태권도 도복을 입은 관장님이 어린이집 가방과 학원 가방 두 개를 들고 나온 아이들을 버스에 태우는 장면을 목격할 수 있다. 물론 학원 가는 걸 진심으로 좋아하는 아이들도 있긴 하다. 하지만 조금 더 큰 초등학생들도 하교 후에 학원 다니는 것을 힘들어하는데 고작 4,5세 아이들이 자기 몸만 한 가방 두 개를 들고 집이 아닌 학원으로 향하는 것이 선생님의 시선으로 바라보기엔 그저 안쓰러울 뿐이다.
이 파트에서 학원비 문제도 빼놓을 수 없다. 한 달 학원비가 과목당 15만 원이라고 어림잡았을 때 학원을 두 군데 이상 보낼 경우 월 30만 원 이상의 비용이 발생한다. 만약 자녀가 두 명 이상이면 학원비도 그만큼 배가 될 것이다. 보수적으로 잡아도 이 정도인데 둘 이상의 자녀를 여러 학원에 보내야 하는 상황이라면 아무리 맞벌이 부부라도 다달이 학원비를 지출하는 게 상당히 부담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부모 둘 다 직장은 다녀야 하고 일찍 하교하는 아이를 집에 두기엔 불안하니 큰 비용을 지불해서라도 학원 뺑뺑이를 돌릴 수밖에 없다. 이는 조기교육을 위해 자녀를 교과목 학원에 보내는 것과 맥락이 완전히 다르다. 우리나라의 사교육비 실태에 관한 이야기는 다른 파트에서 자세히 다루도록 하겠다.
가고 싶지 않은 학원을 전전하는 아이들도, 그런 아이를 학원에 보낼 수밖에 없는 부모도 모두 마음이 편치 않다. 아이를 학원에 보내지 않으려면 부모가 자녀 하교 후에 양육을 도맡아 하면 되겠지만 현실이 말처럼 쉽게 돌아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한창 어른들의 보호를 받아야 할 아이들을 직접 케어하지 못해 학원 선생님들한테 기대야만 하는 대한민국의 부모들은 오늘도 학원에 있을 자녀에게 미안해하며 묵묵히 일을 하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