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혁명의 허구
과학혁명 – 과학은 내 편이 아니었다.
르네상스 이후 약 500년간 인간의 지배력은 엄청나게 강해졌고 특히 농업혁명 이후 18세기 영국의 산업혁명을 거치며 인간의 과학은 이제 인간 이상의 또 다른 신인류를 탄생시키는 지점까지 도달했다. 달을 정복하고 우주를 왕복하고 4차 산업혁명의 문을 열며 과연 인간이 추구하는 과학에는 한계가 있을까 싶은 호기심 반 의문 반 새로운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 밀려오는 것도 사실이다.
여하튼, 우리는 일명 ‘과학혁명’이라 불리는 혁명적인 시기를 거치면서 많은 진보를 했다. 일단 전통적 지식인 ‘모든 세상은 신의 계획하에 의해 움직인다.’라는 전지전능의 권력에 반항한 과학주의는 자연과 인간에 대한 무지의 인정, 수리학이 중심적 위치를 차지한 폭넓은 관찰과 실험, 불완전성을 인정한 이론의 정립을 통해 새 힘을 획득하게 되었다. 결국 ‘전지적 관점을 포기 또는 양보’하는 실패의 진화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근대 이후 ‘무지의 인정’은 지금과 같은 첨단과학으로 진보할 수 있게 했고, 무지를 탈출하고자 하는 탐구로 가난, 질병, 노화, 죽음 등, 전지전능자에게 의존했던 인류는 무지와 불안전성, 반복되는 실패의 과학으로 진화를 촉진하고 있다.
한마디로, 지난 5백 년간 과학, 제국, 자본은 무지, 즉 과거의 실패가 진화된 결과이고 지금도 무지는 인간 스스로 진화를 촉발하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산업혁명으로 인한 생산량의 급격한 증가는 소비를 촉진 시켰고, 기계화 및 분업화로 확대된 시장은 오히려 가족, 지역 공동체의 붕괴와 제국, 왕국, 종교, 민족주의 공동체 강화를 가속화했다.
항상 실패는 진화를 촉구한다.
과학혁명으로 인한 생산력의 거대한 증가가 인류를 풍요롭고 행복하게 진행되는지는 생각해 봐야 할 여러 담론을 제시하지만, 유발하라리의 주장에 의하면 인류는 농업혁명 때 수렵생활보다 풍요롭지 못한 삶을 살았다고 하는 점을 감안할 때 막대한 생산력 향상에 성공한 자본주의도 부의 편중으로 인한 ‘공황’과 ‘과학’이 아닌, ‘과학주의’에 빠지는 오류, 분배의 실패를 가속화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현대 우리의 불안은 자연적인 수렵생활에서 집단적인 ‘농업혁명’으로 기대가 실패를 불러온 과거의 역사를 다시 되풀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확한 사실은 그 시대를 대변하는 하나의 명제가 바로 그 시대의 지배우위 계층을 만든다는 사실이다.
노예제에서는 노예를 많이 소유한 자가 부자이고,
봉건제에서는 토지와 농노를 많이 소유한 자가,
자본주의에서는 자본을 많이 소유한 자가 부자이다.
자본주의 환경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50년을 넘게 살아온 나에게도 자본을 요구하는 자본주의는 가혹한 삶을 강제했다. 학교는 나를 위해서가 아닌 성적을 위해서 치열한 경쟁과 불안을 강요했고, 회사는 나의 발전, 성취, 성장에 관심 있는 조직이 아니었다. 나는 부모 세대에게서 배운 대로 (열심히 공부하고 좋은 학교 가서 좋은 직장, 결혼, 저축하고 집사고 퇴직금 받아 자녀 세대에게 보살핌받다가 생을 마감하는) 살면 안 된다는 것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이제부터라도 나는 나의 자본, 즉 자산수익을 창출해야만 인류가 처음 맞이하는 100세 세대에서 생존할 수 있는 환경이 되었음을 깨닫고 준비해야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나와 환경 삶의 도구를 찾기 위해 공부해야 했다.
기성세대와 신세대가 함께 경쟁하는 사회.
부모와 자식이 함께 취업을 겨뤄야 하는 시대.
나는 이 시대 20대의 자식들과 함께 남은 50여 년의 삶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
이런 이유로 내가 선택한 공부는
첫째, 나 자신을 들여다보는 나를 알아가는 독서
둘째, 나를 둘러싼 환경 즉 자본주의를 알아가는 독서
셋째, 나와 환경의 이해를 통해 내가 자산을 형성할 수 있는 도구에 대한 독서
일단 독서가 가장 중요한 시작이었다. 학교에서 못 배우고 또 어디서도 배울 수 없는 것을 책에서라도 배워야 했기에 책부터 시작하는 것은 오답을 피할 수 있는 가장 지름길이었다. 우선, 세 명이 시작한 독서는 많은 사람이 참여와 이탈을 반복했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았고 3년 차에 새벽독서를 시작하면서부터 특별한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새벽 5시에 일어나 줌에 접속하고 6시까지의 독서와 7시까지의 토론을 통해 집단지성이 발휘되었다. 사실 현재 독서모임에서 내가 가장 나이가 많다. 그만큼 사람들은 나이가 들어가며 공부하지 않는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진화하고 적응하고 있음을 느낀다.
독서를 통해 배운 대로 나의 사업 또한 노동 중심이 아닌 플랫폼으로 변환시켰다. 월급을 주고 그만큼 일을 시키는 시스템이 아니라, 직원에서 파트너로, 그러니까 나에게서 사업을 배우고 직원도 자기 사업으로 성장해 나가는 방식으로 전환했다. 일의 성과는 당연히 상승하였다. 인센티브와는 차원이 달랐다. 인센티브제는 일시적이고 결국 달콤한 설탕으로 일정 기간 보상에 길들이는, 오히려 더 깊이 직원의 삶을 살게 하는 지름길일 수 있으나 파트너십으로 뭉친 이들은 스스로가 다 회사의 오너라는 마인드로 각자의 사업을 해나가게 된 것이다. 서로 선의의 경쟁을 하기도 협력하기도 하면서 승-승의 시너지를 내는 이 단순한 시스템을 서서히 배운 대로 현실에 접목하면서 말 그대로, 집단의 힘을 키워간 것이다.
한마디로, 나는 나의 무지를 인정하고 집단의 지성에 의지하기로 했다. 각자의 이기심을 키워 집단의 힘으로 모아갔다. 각자는 각자 자기 사업을 하며 서로의 집단협력이 형성되는 플랫폼 사업이 나의 사업이 되었다. 하지만 이 역시 경제상황에 좌지우지될 수밖에 없었으니 나는 정말 탄탄한 플랫폼 구축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책에서 배우고, 현장에서 경험으로 배우고, 이론과 경험 모두가 복합적으로 내 삶에서 발현되면서 더 큰 사업을 꿈꾸게 된 것이다.
독서를 통해 거대한 실패와 진화를 이해하게 되면서 화폐, 제국, 종교, 자본주의, 과학혁명 등 거대한 움직임이 개인의 무지와 무기력을 더 크게 느끼게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돈’이라는 거대한 상상력의 위계질서 아래서 나 역시 무력함이 더 커졌다. 나는 이 허구의 거대한 위계질서를 바꾸기 위해 노력했던 젊은 시절의 방식에서, 나를 바꾸는 방향으로 삶의 방식을 바꾸기로 했다. 나를 인지하고, 환경을 인지하고, 나의 사명을 세우고, 행동양식을 바꾸기로 했다. 결국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은 ‘나’ 뿐임을 깨달았다. 나는 내가 태어난 이유와 살아갈 사명과 목표를 정하고 그 목표를 위해 루틴을 매일 반복하는 삶으로 살아가기로 했다.
‘이 세상에 통제가능한 것은 나밖에 없다’
나는 50대 중반이다.
첨단과학의 시대에 이를 따라가기에 확실히 여러 가지 면에서 무지하고 적응이 더디고 배우기도 어렵다. 그렇지만 책을 통해 정말 중요하게 깨달은 바는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나를 바꾸는 것이었다.
제 아무리 화폐가, 자본주의가, 과학혁명이 세상을 거대하게 움직인다고 하더라도
우리 중년들이 반드시 명심해야 할 사실은
자신의 인생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어떤 경우에도 이 위계 아래에서, 우리는 자기 자신으로서 살아내야 한다.
거대한 움직임에 대해 무력함으로 오히려 무지를 인정해야 하고
거대한 움직임에 대해 무지함으로 오히려 자신을 들여다봐야 한다.
우리 모두는 지금부터라도 자신에게 집중해야만 한다.
제 아무리 과학이 판치는 세상이라도
나의 본성에 집중하여
100세 시대를 살아갈 시작을 지금부터라도 해야만 한다.
늦지 않았다.
세상에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은 오로지 나밖에 없다.
나는 나를 통제하고 조율하고 조절, 절제하여
지금까지의 지속적인 실패를 경험으로 나는 나를 진화시켜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