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품위없는 글을 씁니다. 기억할 필요도 반박할 필요도 없죠
때는 2003년 19살의 키 크고 눈이 쿤 어린 바이어가 한국에 왔다.
나와 함께 요르단으로 보낼 차를 사고 신기한 듯 큰 눈을 휘둥그레하게 뜨고 이것 저것 호기심으로 물어보면서도 의젓하고 젊잖으면서도 신실한 청년 이었다.
한국에서 제대로 사업을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진지하게 조언을 구했고,
나는 차 사는 일을 멈추고 한국어 부터 제대로 배워 보라고 했다
다음날 결심을 알려왔고 나는 연세대학교 한국어학당에 그를 입학시키고 집도 우리집 근처에 작은 원룸을 2천만원 전세로 얻어 주었다.
저녁이면 우리 아이들에게 피자도 사주고 삼촌처럼 지냈고 그는 한국어학당을 마치고 유창한 한국어를 구사하게 되었다.
어느날 내게 이쁜 여선생님이 있는데 그에게 고맙다는 표현을 어떻게 하는게 좋겠냐고 물었고
나는 '내아를나도!' 라고 알려주었고,
그 다음날 내게 전화가 와서 씩씩 대며 난리를 쳤다.
그리고 제대로 다시 알려 달라고 했고 나는 다시 '같이잡시다'를 알려줬고,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세월이 지나 나는 요르단으로 다시 몽골로 6년이 넘는 세월을 지냈고
2011년 다시 한국에 돌아오니 버젓한 사장님으로 회사를 잘 운영 할 뿐 더러 결혼도 하고 아이의 아버지가 되어있었다.(지금은 3명의 아이가 있고 더 낳을 계획)
새로 진행하는 사업을 위해 몇번의 전화통화와 새 사업에 필요한 요르단에 업체를 찾느라 요르단에 있을 때 카톡을 주고받았고
한국에 들어왔다고 꼭 만나고 싶다고 해서 인천에 간김에 전화를 하고 그의 사무실에서 만났다
자동차 수출 사업과 관련한 몇가지 새로운 제안을 하고
내가 현재 진행하고 있는 사업을 설명하였다.
그의 사업은 번창하여 중국의대를 졸업한 그의 동생이(그때는 너무 어린 초등학교 들어가기전 어린이) 중국에서 새 자동차를 2000대나 수출하고 있다고 한다.
나의 사업 설명을 들은 그는 김빤짝! 스틸 빤짝 이라며 나를 치켜세우고 끌어안고 주먹을 마주치고(요르단 바이어들은 나를 김빤짝이라고 부른다. 바이어들은 좋은 차를 만나면 엄지를 치켜세우며 빤짝빤짝 이라고 흡족함을 표현하는데 우리로 치면 따봉 정도 될것이다.)
집으로 돌아오는길 나 스스로에게 말했다 김빤짝 스틸 ~ 빤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