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랑 같이 목욕탕 가요~”
그 말을 끝으로 선생님은 잠깐 자리를 비우셨다. 어둡고 고요한 초음파실에 홀로 남은 나는 방금 들은 말을 곱씹었다.
'그니까... 딸이라는 거지? 다른 의미는 없는 거지?'
우-와!
나도 모르게 두 손을 입에 모으고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딸이길 바랐는데 정말 딸이 와 줬구나! 어떻게 하지? 너무 기쁘다. 그런데 이렇게 맘껏 기뻐해도 괜찮을까? 너무 좋아하면 부정 탈까 봐 무서운데. 별의별 생각이 다 스쳐 가던 중 선생님이 돌아오셨고, 중단됐던 초음파가 이어졌다. 꼼꼼한 성격답게 선생님은 똥끼를 구석구석 세심하게 살펴보셨고 다행히 특별한 이상은 없었다.
"잘 크고 있네요.
2주 뒤 양수 검사할 때 다시 오시면 될 것 같아요."
"선생님, 저 항인지질항체 수치 피검사도
다시 하고 싶어요."
"왜요?"
"전 병원에서 원장님이 임신하면 이 수치가
팍 오르는 사람들도 있다고 하셨거든요.
혹시 제가 그 케이스일까 봐 무서워요."
"그래요. 피 뽑고 가세요 그러면."
며칠 뒤 받은 결과는 의외였다. 첫 검사 때보다 수치가 오히려 낮아진 것이다. 처음에는 ‘양성’이었는데 이번에는 ‘약양성’ 정도? 마음 한켠에 늘 걸렸던 문제였는데 이번 기회에 확인하게 돼서 다행이었다. 나는 그냥 지금 정도의 처방만 받으면 될 것 같았다.
임산부들은 임신 초기에는 산부인과를 자주 가지만, 중기에는 보통 한 달 간격으로 방문한다. 그러나 우여곡절끝에 아이를 얻은 나는 조금이라도 이상이 있으면 참지 못하고 동네 병원으로 달려가 초음파를 보곤 했다. 그러다 너무 자주 가는 것 같아 스스로도 민망해질 즈음, 결국 유명한 하이베X를 샀다. 아기 심장 소리를 집에서도 들을 수 있는 기구였다.
원래는 이런 기구가 아기에게 스트레스를 줄 수 있다는 말이 있어서 안 사고 버티고 있었는데 하루 종일 누워 안 좋은 생각만 하는 내 모습을 보니 차라리 가끔씩 확인해보고 맘 편해지는 게 낫겠다 싶었다.
인터넷에서 사용법을 대충 훑어보고, '아 알겠다!'란 생각에 바로 야심차게 알로에젤을 배에 덕지덕지 바르고 스틱을 갖다 댔다. 그러나 첫 시도는 완전히 실패! 여기저기 움직여봐도 지지직하는 잡음만 들려오고 똥끼의 소리는 전혀 잡히지 않았다. 마음 같아선 될 때까지 하루 종일 하고 싶었지만 똥끼에게 무리가 될까 봐 첫 시도는 여기서 멈추기로 했다.
이틀 뒤, 인터넷 꿀팁을 정독하고 하이베X를 다시 들었다. 알고 보니 똥끼는 배꼽보다 훨씬 아래 팬티라인에서 왔다-갔다- 하고 있었지 뭔가. 처음 하이베X로 똥끼를 찾는 데 성공했을 때의 기분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평소에는 7-80이라는 애매한 수치만 보다가 140bpm이 넘는 높은 수치와 함께 선명한 심장소리를 들었을 때. 그건 병원에서 원장님을 통해 초음파로 똥끼를 만나는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조용한 안방에서, 나와 똥끼, 둘만이 오롯이 교감하는 느낌이랄까. 정말 따뜻하고 행복한 기분이었다.
양수 검사 날짜가 다가오면서, 예정대로 크녹산과 아스피린을 며칠은 끊어야 했다. 불안해서 그 기간에는 매일같이 하이베X를 켜서 똥끼가 잘 있는지 확인했다. 덕분에 비교적 덜 불안한 마음으로 양수 검사날을 맞이할 수 있었다.
검사일. 병원에 도착해서 우선 혈압을 쟀다. 긴장한 탓일까, 그동안은 혈압이 아무리 높아도 130 언저리가 나왔었는데 이 날은 150이 넘는 저세상 수치가 나왔다. 에이 긴장해서 그럴 거야~ 생각하며 다시 재 봤는데도 또 150대가 나왔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나는 원장님이 무언가 말씀하시거나 조치를 해주실 줄 알았지만, 아무 말씀이 없었다. 지금 돌아보면 내 혈압 수치를 모르셨던 것 같다. 이런 건 병원 입구에서 간호사가 체크하고 마는 거니까.
"검사 시작할게요~"
원장님은 초음파 화면을 보며 아기를 피해 주삿바늘을 찔러 양수를 채취했다. 아플까봐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너무 금세 끝나 통증이랄 것도 못 느꼈다. 다만 양수가 내 상상처럼 하얀색이 아니라 약간 노르스름해서 놀랐던 게 기억이 난다.
이 날 뽑은 양수로 이제 여러 가지 검사를 하게 될 것이었다. 다운, 에드워드,파타후 증후군 같은 건 결과가 다음 날 빨리 나오지만 내가 가장 알고 싶은 미세결실 검사는 한 달은 기다려야 알 수 있어서, 그때까지 피 좀 마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밤. 내 안의 큰 과제였던 양수 검사를 끝내고 한껏 후련해져야 할 타이밍이었는데 하필 남편과 시시한 일로 말다툼을 했다. 결혼 후 수없이 해온 사소한 싸움이었지만 그날은 유난히 머리가 아프고 속이 울렁거렸다. 결국 나는 아주 늦은 새벽이 되어서야 겨우 잠이 들었다.
다음날, 오후가 돼서야 느지막이 눈을 뜬 나는 출출하니 떡이나 사 와야겠단 생각에 대충 패딩을 걸쳐 입고 밖으로 나왔다. 맘에 드는 떡 두어 개를 사서 집으로 가는데 무언가 밑에서 울컥하고 생리처럼 흘러나오는 듯한 느낌이 드는게 아닌가.
‘아 분비물인가. 기분 별로네.'
울컥. 울컥.
그런데 분비물이라기엔 너무 양이 많은 것 같았다.
‘설마...? 아니겠지...'
아닐 거라고 애써 부정했지만 10주 무렵 하혈로 응급실에 갔던 트라우마 때문에 평정심을 찾기가 힘들었다.
집에 도착한 나는 입고 있던 패딩과 사온 떡을 내동댕이치고 바로 화장실로 달려갔다. 속옷은 이미 피로 가득했고, 새로운 피들이 실시간으로 후두둑 떨어지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알았다. 아... 이건 닦아낼 수 있는 양이 아니다. 그냥 닦는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다.
나는 중력의 힘이라도 거슬러 보고자 다급히 거실로 가서 일단 바닥에 드러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