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또 하혈해서 응급실 가는 중이야."
남편은 내가 처음 그런 말을 했을 땐 별일 아닐 거라 생각했었다고 한다. 몇 주 전에도 비슷한 증상으로 병원에 갔다가 금세 집으로 돌아왔었으니까.
그래서 이번에도 그냥 작은 해프닝쯤으로 여기고 퇴근한 남편은, 돌아가는 상황을 보고 깜짝 놀랐다.
입원이라니, 그것도 고위험 산모실이라니?
“보통 이런 경우엔
출산할 때까지 퇴원 못 하는 경우가 많아요.”
간호사의 말에 남편과 부모님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 역시 두려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렇게 생각했다.
‘이렇게라도 아기를 지킬 수 있다면 다행이지.’
마치 전쟁터로 나가는 사람처럼 마음을 단단히 굳혔다.
그러나 병동 생활은 내 상상보다 훨씬 더 힘들었다.
삐-삐- 하루 종일 여기저기서 울려대는 태아감시장치.
허리가 부러질 듯 딱딱한 침대.
몇 시간이고 통화로 병실을 울려대는 빌런 산모까지.
'아니, 고위험 산모라서 대학병원에 입원해 놓고
저게 뭐 하는 짓이래?‘
그런 빌런을 보며 처음엔 화도 났고, 한심하다고도 생각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니 생각이 쪼금은 달라졌다.
그래 뭐, 우리같은 사람한텐 그 통화조차
하루의 유일한 위안일지도 모르겠네.
아주 조금, 손톱만큼은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입원 이틀째 저녁.
나는 그제야 '내가 고위험산모실에 있다는 사실'을 조금씩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여러 생각, 특히 비관적인 생각들로 잠을 이루지 못하던 중 배 아래 깊은 곳에서 퍼억! 하고 차오르는 느낌을 받았다. 옷을 걷자 이번엔 아랫배가 울컥 솟아오르는 게 맨 눈으로도 보였다. 아, 말로만 듣던 태동이었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어제부터 내내 울기만 했던 나에게 똥끼가 "엄마 나 잘 있어! 그만 걱정해!" 하고, 한 소리를 해 주는 것만 같았다. 그래, 정신 차리자. 내가 엄만데 이렇게 무너져 있는 건 너무 한심하잖아. 그날은 그렇게 똥끼의 작은 응원을 받아 오랜만에 깊은 잠을 잘 수 있었다.
입원 사흘째.
첫날 콸콸 쏟아지던 선홍색 피는 어느새 갈색으로 바뀌었고, 양도 훨씬 줄어들었다.
"큰 고비는 넘긴 것 같아요." 교수님의 말에 안심했다.
그즈음 되자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고 주위를 둘러볼 여유도 생겨났다. 우리 병실에는 다양한 이유를 안고서 병원을 찾은 산모들이 있었다. 조기 진통, 양수 이상, 아기 발육 문제 등… 사연은 달라도 우린 모두 같은 목표를 향해 조용하고 치열한 싸움을 하고 있었다.
저 사람들이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을까 싶다가도, 그분들의 배가 나보다 훨-씬 나와있는 걸 보면 아, 부럽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어린 마음에 말이다.
입원 5일째.
출혈도 많이 줄었고, 이대로라면 퇴원이 머지않았다는 생각까지 했었는데 전혀 예상치 못한 문제가 터졌다. 입원 초기에 출혈이 무서워 소변을 지나치게 참았더니, 이제는 화장실에 가도 오줌이 나오질 않는 거다. 벌컥벌컥 물을 들이켜보기도 했지만 소용없었고, 배만 터질 듯 빵빵해졌다. 밑 통증이 심해져 초음파를 해보니 초음파 속 내 방광이 물주머니처럼 부풀어 있었다. 방광염이었다.
“일단 오줌부터 뽑아내죠."
의사에 오더 아래 간호사가 소변줄을 꽂았다. 아무리 용을 써도 나오지 않던 오줌이 소변줄을 꽂자마자 자동으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수치스러운 마음이 일었지만 수치심보다 해방감이 더 컸다.
아 배설의 기쁨이란 게 이런 거였구나.
입원한 지 일주일.
똥끼는 주수대로 잘 자라고 있었지만 떨어졌던 태반 아래로 고인 피는 여전히 그대로였다.
'제발 저 피만 좀 사라져 줬으면!!'
조급한 마음이 다시 스멀스멀 올라왔지만,
그런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었다.
마음을 가다듬고 병실로 천천히 걸어 돌아왔다.
우리 산부인과 병동 한쪽에는 NICU(신생아중환자실)가 있고, 그 옆에는 니큐에서 태어나 건강히 자라난 아이들의 사진이 전시되어 있었다. 태어날 땐 갓 태어난 강아지만했던 아이들이 저렇게나 잘 컸다니.
새삼 현대 의학 기술이 놀랍게 느껴졌고 동시에 어느 날엔가 교수님께서 말씀하셨던 게 떠올랐다.
“24주만 되었어도, 내가 애를 꺼내든 뭘 할 수 있을 텐데 말이죠.”
그렇다면 그 의학적으로 중요하다는 24주를 목표로 잡고 버텨볼까. 아직 임신 20주도 안 된 내게 분만예정일인 40주는 너무나도 멀고 아득하게만 느껴졌기 때문에, 일단은 눈앞에 현실적인 목표가 하나 있어야 내가 정신적으로 덜 힘들 것 같았다.
그래서 우선 ‘24주까지 버티기’를 내 1차 목표로 삼기로 했다. 자, 앞으로 6주정도 남았다.
이 무렵 똥끼의 태동은 더더욱 거칠어졌다.
태동은 내게 생애 처음 느껴보는 종류의 행복과 감동을 주었지만 그와 동시에 예민한 엄마에게 신경 쓸 숙제를 한 개 더 준 듯한 느낌도 있었다. 태동이 잠잠해지면 불안했고 거칠어지면 다시 안심하고 했기 때문이다.
“이제 코코 씨는 일반 병실로 이동하셔도 될 것 같아요."
교수님의 말에 드디어 고위험산모실을 탈출할 수 있었다.
"탁"
이동하게 된 일반실의(2인실)의 불을 켰다. 이 날은 옆 자리 환자가 없었다. '와 운이 좋다. 1인실 쓰는 거나 다름없잖아!'라고 생각하며 창가 옆 침대에 자리를 잡고 짐 정리를 마무리했다. 후련한 마음으로 침대에 누웠는데 갑자기 밀려드는 적막감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뚝. 떨어져 나왔다. 뭐야. 왜지. 평소 눈물도 잘 없는 나라서 내가 왜 이러는지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래서였던 것 같다. 고위험 산모실에서는 다양한 소음들이 24시간 내내 들려와서 미처 조용히 사색할 시간이 없었는데 반대로 너무 고요한 여기로 오니 그동안 가슴 한 켠에 켜켜이 쌓아만 두었던 감정들이 조금씩 새어 나온 것이다.
"아 딴생각 좀 하자."
일반 병실엔 고위험 산모실엔 없었던 TV도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바로 켜봤지만 내 쓸쓸함은 조금도 채워지지 않았다. 나는 이불에 얼굴을 파묻고 잠시 엉엉 울었다. 때로는, 울어야 끝나는 일이 있다. 눈물도 일종의 정화이니까. 마음속 응어리가 풀릴 때까지 그날은 그렇게 열심히 울었다.
시끌시끌,
며칠 뒤, 비어있던 내 옆 자리에 새 환자가 들어왔다.
제주도에서 서울까지 응급 분만을 위해 비행기를 타고 온 산모였다.
“안녕하세요. 전 셋째 맘이에요.
세 아이 다 남자애고요 하하.
태명을 러브로 지었는데 어쩜 또 아들이네요?”
그녀의 웃음은 적막했던 우리 병실을 환하게 밝혀 주었다.
삼성병원은 모자동실 병원이기 때문에,
‘러브’는 러브맘이 분만을 한 날 저녁부터 우리 병실로 들어와 함께 생활하게 되었다.
우리 병원에서는 핑크색 트롤리 침대 위에 신생아들을 눕힌다. 드르륵 열린 병실 문 사이로 갈갈갈갈 가벼운 바퀴소리와 함께 병실 안으로 실려온 러브의 모습은 세상 누구보다 고귀하고 눈부셨다. 나는 한참을 그 작은 존재에 시선을 뺏겨 있었다.
오며 가며 러브가 누워있는 핑크색 트롤리를 볼 때마다.
병원 복도에서 새 주인을 기다리는 빈 트롤리들을 볼 때마다.
'똥끼야, 너도 건강하게 태어나 저기에 꼭 누워야 해.'
그렇게 다짐하게 되었다.
지금 돌아보면, 작고 낡은 그 핑크색 트롤리가
그 시절 내 하루를 버티게 해 준 유일한 희망이고 꿈이었다.
러브 엄마는 출산 며칠 뒤 러브와 함께 퇴원하였고
왁자지껄했던 병실은 다시 조용해졌다.
오랜만에 본 자궁 초음파에서는 특별하게 달라진 점이 보이지 않았다.
태반 쪽 피고임의 양은 언제나와 같았다.
변화 없는 매일에 초조해하고 있던 어느 날,
간호부장님이 나를 찾아오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