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날로그의 나라 일본에서 산다는 것
일본에는 있지만 한국에는 없는 게 있다. 바로 디지털청(デジタル庁)이다. 2020년 9월 새롭게 취임한 전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수상은 코로나19 유행을 계기로 디지털화에 박차를 가했다.
그 일환으로 2021년 디지털청이 출범했다. 디지털 사회를 실현해 포스트 코로나의 새로운 일본사회를 만든다는 목적이다. 특히 디지털기술의 사각지대라 불리던 행정기관 서비스의 온라인화를 추진하는데, 이는 한국과 비교하면 많은 것이 아날로그 방식으로 운영되는 일본사회에 대한 전면적인 개혁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디지털청 출범 3년 차에 접어든 2023년 현재 일본의 모습은 어떨까? 음식점이나 편의점에서는 카드나 전자페이를 일반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고, 범국가적으로 마이넘버카드를 보급해 행정 효율성 제고를 도모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옛날 방식을 고수하는 일본의 아날로그 방식은 사회 곳곳에 남아있다고 느낀다. 이번 글에서는 직장생활을 하면서 내가 직접 경험한 일본의 아날로그 문화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마이넘버카드(マイナンバーカード)
: 일본에서 2016년부터 시행되고 있는 개인식별번호 제도(일본판 주민등록제도)
일본의 탈(脱) 도장은 과연 가능할까?
나는 한국에서 도장을 사용해 본 적이 손에 꼽는다. 하지만 일본유학이나 취업을 위해 필요한 준비물을 검색하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도장이다. 일본사람들에게 도장은 가장 대표적인 본인 확인의 수단이기 때문이다. 통장개설, 집 계약, 자동차 구입, 결혼, 세금신고, 운전면허증 발급은 물론이고 일상생활에서 영수증이나 택배를 받을 때조차 도장을 사용한다.
일본이 도장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메이지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매우 오랜 역사적 과정 속에서 도장이 행정기관, 개인 간 거래, 회사 간 거래 등 사회적 관계에서의 필수적인 소통수단이라는 점을 이해한다면 일본 직장인들이 서류에 도장을 찍으려고 출근한다는 말이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다.
일본 도쿄의 지하철 주요 역에 등장한 옥외광고 문구도 이런 현실을 대변한다. ‘재택근무가 시작됐다. 도장을 찍으러 출근했다.(ハンコを押すために出社した)’
나 또한 회사에 입사하고 처음으로 한 일 중 하나가 내 이름으로 된 도장을 주문하는 것이었다. 회사에서는 두 개의 도장을 사용하고 있는데, 주로 사용하는 도장은 날짜와 이름이 적힌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정정용 도장(訂正印)이다. 혹시나 수정할 부분이 생길 때는 별도의 이 정정용 도장을 사용해야 하는데, 일반 도장보다는 크기가 작고 성만 적혀있는 만년도장(シャチハタ)인 경우가 많다. 나는 회사에서 전표처리를 할 때 이 도장들을 주로 사용한다.
그 밖에도 회사 부서로 온 우편을 받을 때나 거래처에 차량통행허가서 등을 발급할 때도 담당자의 이름이 적힌 도장을 찍어야 한다. 회사 대부분의 서류에 도장을 찍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회사뿐만이 아니다. 음식점이나 병원에서 영수증을 받을 때도 도장을 찍어서 주는 곳이 많다. 영수증에 문제가 있으면 도장을 찍어준 담당자에게 문의를 하라는 의미다.
코로나 유행을 계기로 일본 특유의 '도장문화'가 디지털화의 큰 장애요인으로 대두되면서 개선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지만, 서류를 스캔해 날인란을 식별하고 도장을 찍는 최첨단 자동 날인 로봇을 개발하거나 디지털 환경에서조차 인감을 구현할 만큼 도장문화가 여전히 뿌리 깊게 남아있어 새로운 디지털 사회로의 이행에는 다소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여전히 일본 회사에서 건재한 팩스
최첨단 디지털 사회 속에서 살고 있는 지금도 여전히 일본은 사회 전반적으로 팩스를 활발히 사용하고 있는 국가 중 하나다. 이메일과 비교해 비효율적임에도 불구하고, 매뉴얼을 중시하고 변화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일본인들의 특성 탓에 팩스는 여전히 일본 회사에서 건재한 '현역'이다.
나는 거래처에 견적서를 의뢰하거나 가격 협상을 할 때 이메일과 팩스 둘 다 사용하고 있다. 주로 이메일을 이용하지만, 거래처에 따라서는 반드시 팩스나 우편으로 서류를 보내달라고 하는 곳도 있다. 특히 규모가 작은 회사일수록 팩스 사용률이 압도적으로 높다.
이렇게 팩스를 사용하게 되면 몇 가지 불편한 점이 발생한다. 가령 견적의뢰를 할 때 거래처에 도면을 함께 첨부하는 경우가 많은데, 오래돼서 화질이 좋지 않거나 복잡한 도면은 팩스로 보내는 게 의미가 없어진다. 팩스를 거치면 화질이 더 깨지고 글씨가 작아져 내용을 알아보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따로 pdf 파일을 메일에 첨부해서 한번 더 보내야 하는 수고스러움이 있다. 이와 관련해 다음 글에서 구매업무에서 전자화거래(e-commerce) 확대를 추진한 프로젝트에 관해 글을 써보고자 한다.(10화 일본 회사에서 구매업무 전자화 거래 확대 추진하기)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그렇다면 수시로 복합기에 가서 온 팩스가 있는지 확인해야 하느냐. 그건 아니다. 우리 회사의 경우 후지필름비즈니스이노베이션에서 만든 도큐웍스(Docuworks)라는 오피스솔루션 소프트웨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을 이용하면 회사 부서로 온 팩스 문서를 내 자리에서 간편하게 확인할 수 있다. 다만 팩스라는 오래된 통신 수단의 궤도를 여전히 벗어나지 못한 채, 어떻게 해서든 현재의 최첨단 기술과 병립시키려는 모습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종이 왕국' 일본
일본에서 일을 하며 느낀 점 중 하나는 일본인은 무엇이든 늘 기록한다는 것이다. 좋고 나쁨을 떠나서 사소한 것이라도 종이에 기록하는 게 ‘생활화’되어있다는 느낌이다. 단적인 예로 한국에서는 어느 병원에 가도 환자 진료기록을 컴퓨터에 저장해 두어 쉽게 데이터를 찾아 진료를 볼 수 있지만, 일본 병원은 접수대 뒤쪽의 서류꽂이에 진료카드와 환자 정보가 기록된 각종 종이서류가 도서관처럼 빽빽하게 채워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병원을 갈 때도 꼭 챙겨야 하는 몇 가지 서류가 있다. 먼저 진료증과 건강보험증, 예약확인증(予約票) 지참이 기본이다. 병원마다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아날로그의 나라답게 아래 사진처럼 검진 결과를 정성스러운 손글씨로 받는 특별한 경험도 할 수 있다. 또 약처방을 받기 위해서는 약 수첩(おくすり手帳)을 가져가야 하는데, 그동안 내가 어떤 약을 처방받았는지를 기록해 두는 용도로 쓰인다.
병원을 예시로 들었지만 일본 생활을 하면 관공서, 회사 등 어디를 가도 종이로 된 서류가 많기 때문에 종이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된다. 이러한 일본의 '종이 사랑'은 앞서 말한 팩스와 도장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팩스의 경우 수신한 팩스를 종이로 인쇄하여 바로 확인할 수 있고, 그대로 보관할 수 있어 일본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매체다. 도장문화가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이유 또한 종이 서류에 도장이 있어야만 서류의 진위를 가릴 수 있다는 일본인들의 강한 믿음에 기반한다. 이메일보다 종이 서류, 전화보다 공식 우편물을 중시하는 일본 문화가 엿보이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