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마와 아니무스
"사랑"
오직 사랑만이 날 구원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시멘트먼지 같은 사회지만 가끔씩 사랑이라는 사탕이 쥐어졌을 때는 너무나도 달콤했으니깐. 나를 외면하고 상처 주고 이용하는 사람이지만 나를 사랑해 줄 때는 쓸모없던 내가 귀중해졌으니깐. 그래서 나의 아픔을 포용해 주고 사랑으로 감싸줄 사람, 구원자를 계속 찾아다녔다. 미성숙했던 나는 번번이 실패로 끝났지만 그럼에도
'사랑받지 못하는 것은 슬프나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더 슬프다.'
어디선가 지나가다 본 이 글귀는 참 와닿았고, 한동안 나의 배경화면을 장식했다. 상처받음에도 계속해서 사람을 사랑하고 사랑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
융은 남성의 무의식 안에 존재하는 여성성을 '아니마', 여성의 무의식에 존재하는 남성성을 ‘아니무스’라고 정의하고 이 아니마와 아니무스가 현실 세계에 실체화되었을 때 저 사람이 날 설레게 한다고 느끼지만 사실은 우리 무의식이 원인(방어기제인 투사)이 되어 사랑에 빠진다고 한다.
보통 동성끼리는 비슷한 성격과 취향을 가진 사람끼리 어울리게 되는데 이성관계에서는 특이하게 정반대의 사람에게 끌리게 되어 만나는 경우가 아니마, 아니무스가 발현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니무스. 딱 한 번, 첫 연애도 아니고 자유로운 연애 중이던 나의 20대 초반 시절 그를 만났다. 대학교 봉사활동 연합에서 처음 만난 그는 까아만 눈동자에 면도기로 밀어도 점점점 남아있는 콧수염 자국이 마치 똘망 똘망한 강아지 같았다. 171cm의 작은 키에 스키니 한 체형, 스트릿한 패션 스타일, 연프(연애프로그램)를 좀 봤다면 환승연애 1의 호민이나 환승연애 2의 규민이 같은 유형. 난 저 멀리 서성이며 나를 찾는 그에게 목까지 올라오는 심박동을 느끼며 전봇대 뒤로 숨어댔다. 찜닭의 당면을 집는데 젓가락을 든 내 손이 덜덜 댔다. 자존감 밑바닥녀는 이런 좋은 사람이 나 같은 별로인 인간을 만날 봐엔 똑같은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게 맞단 생각이 든다. 하지만 결국 인간의 욕심은 그를 탐하고 재앙은 시작된다. 그는 나의 아니무스 하지만 나는 그의 낫(not) 아니마. 뜨거운 사랑도 오로지 그녀 한정. 그도 나를 여자친구로 대해주는 걸 알지만 서로의 사랑의 크기는 절대로 비슷하지 않아. 굳이 수치로 따지자면 내가 100이라면 그는 20. 머리로는 받아들이려 해도 도무지 채워지지 않는 나의 가슴은 눈물로 매일을 메꾼다. 영화 ‘1리터의 눈물’이 정말 과장이 아니라는 걸 한번 울면 두세 시간을 멈추지 않는 마르지 않는 나의 눈물샘으로 항상 데이트하다 울고 전화하다 울고 졸업사진을 찍는 전날까지 5시간을 내리 울다 가며 깨닫는다.
그가 왜 이리 좋았지? 시간이 좀 지나고 객관화가 가능해질 때, 나는 그 자체가 좋았던 게 아니고 그를 사랑했던 내 감정에 흠뻑 빠졌었단 걸 느낀다. 그는 나의 아니무스. 그때도 지금도 그에게 느꼈던 감정을 다시금 들게 만드는 사람은 나타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 공학용 계산기를 이용해 전기기사 문제집을 푸는 그가 멋있었다. 항상 옷을 깔끔하게 입고 자신의 물건을 옆에 잘 개켜놓는 그가 좋았다. 내가 겉옷을 아무렇게 휙 던져놓으면 픽 웃던 그가 좋았다. 담배를 피우지 않고 술주정도 없던 그가 좋았다. 동기랑 술을 먹고 술꼬장을 부리던 나를 가만히 잡아주는 그가 좋았다. 그의 첫 섹스가 나여서 좋았다. 나랑 데이트할 밥값을 벌려고 알바를 시작한 그가 좋았다. 술 먹고 아빠욕을 하며 우는 나를 그냥 지켜만 보는 그가 미웠다. 결혼하자고 하니 4계절은 만나고 결혼하는 거라던 그가 미웠다. 너는 더 이상 나를 안 좋아하는 거 같다 하니 대답 없는 그 때문에 슬펐다. 마지막 날, 시간을 갖더니 생각보다 안 힘들었다는 그가, 떠나는 그를 뒤돌아 보는데 나를 안 돌아보는 그를 바라보며 아팠다. 2년 뒤 만난 그에게 정말 헤어진 이유를 물어보니 "너의 가족"이라 했다. 개새끼. 나는 앞으로 결혼은 못하겠구나, 절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