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쓰는 것을 보며 비웃는 애쓰는 나르시시스트의 우월함과 열등함
언니가 나를 보고 웃고 있었다.
계속 따라오며 붙잡는 엄마를 뿌리치고 있는 나를 보며,
이 모든 상황을 아파트 창문 베란다에서 내려다보면서 한 손에는 담배를 들고 이빨이 보이게 활짝 웃고 있었다.
결혼을 하고 처음 맞은 추석, 고민하다 고향이 가고 싶어 잠깐 친정집에 들렸을 때 일어난 사건이다.
최소한의 시간만 같이 있고 싶었기에 언니에게 언제 친정을 가는지, 자고 가는지 물어보고 맞추고 간 친정. 엄마는 또 자기 맘대로 우리 부부 입장은 생각을 안 하고 친정 가는 당일 아침, 예상 도착시간보다 먼저 점심을 먹고 주변을 둘러보자고 카톡을 보낸다. 우리 잠깐만 있다 가는 거라 하니 그런 식이면 아예 오지 말라는 엄마. 그러면서도 내가 얼마나 너를 보고 싶어 하는데, 너는 나를 안 보고 싶어 하는 거니, 엄마는 참 서운하네, 지긋지긋하다. 이미 며칠 전에 일정을 다 공지했는데도 깡그리 무시하는 게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어쨌든 가기로 한 날이니 엄마의 감정기복은 무시하고 도착한 친정은 언니는 이미 와있고 여전한 부모와 안 치워진 집은 손님 맞을 준비가 안되어 있다. 딸기는 씻어놨길래 딸기 먹으며 가족이 모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온통 나에 대한 시비와 잔소리뿐인 자리에서 딱히 할 말 없는 나는 자리가 불편해 밥만 먹고 일어나려 했다.
엄마는 자고 가라고 나에게 여러 번 얘기해도 안 먹히니, 뒤에서 남편에게 여러 번, 언니에게 여러 번 사람 곤란하게 꼬셔댔다. 바쁘신 예체능인이신 언니는 저녁에 스케줄이 있다 하니 별말 없이 보내주면서 우리 부부도 다른 곳 여행하려고 숙소도 잡아놨다는데 이해해주지 못하는 부모, 결국 엄마가 나를 방으로 끌고 간다.
“너 왜 그러니?”
“내가 왜? 엄마한테 전부터 얘기했잖아, 우리 저녁에 일정 있다고. 온 김에 여행지 좀 둘러보려고 숙소도 그쪽으로 잡아놓았구먼, 갑자기 이러는 건 엄마야.”
“자고 가.”
“못 자. 숙소도 다 잡아놔서 취소하려면 수수료 들어서 안돼.”
“엄마아빠가 너한테 잘못했니?”
“엄마, 그만해. 딱 여기까지야. 명절에 친정집 왔잖아. 이 이상을 바라지 말라고. 여기서 더 바라면 친정집 다시는 안 올 거야. 엄마랑 연락도 아예 안 할 거야. 그러니 그만 바래. 그만해. 그만하라고.”
엄마의 눈이 빨개졌다. 그리고 내 손목을 꽉 잡았다. 그리고 놓아주지 않았다.
“왜 이래. 선 넘지 말라고 했지. 손목 놔.”
“못 놔. 자고 가.”
“나 소리 지른다? 진짜 뭐 하는 거야?”
나는 결국 남편을 불렀고 엄마는 손목을 놓았고 급하게 친정집에서 떠날 채비를 했다. 엄마는 떠나는 우리 부부를 엘리베이터, 주차장까지 계속 쫓아오며 울면서 내 머리를 때렸다. 남편은 엄마에게 이렇게까지 해야 하냐며 나에게 울분을 토했다. 그리고 베란다에서 담배 피우는 언니가 보였다.
언니는 이 모든 상황을 베란다에서 지켜보며 웃고 있었다. 이빨과 그 안의 혀가 보이게 활짝 웃고 있던 언니는 내가 쳐다보자 손을 흔들었다.
‘잘 가.’
나도 언니를 보며 손을 흔들었다. ‘안녕.’
원은수의 “나에겐 상처받을 이유가 없다”에서는 나르시시스트에 대해서만 아주 전문적으로 상세히 설명해 준다.
의도가 있건 없건 나르시시스트가 상대에게 상처를 주는 행위를 반복하는 이유는, 자신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줬다는 것 자체를 신경 쓰지 않기 때문이다. 상대의 고통에 공감하지 않고 죄책감도 잘 느끼지 않으니 상대가 자신으로 인해 어떤 심정인지 신경 쓸 필요조차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따라서 나르시시스트에게 반복적으로 상처를 받는 상황이라면 그에게 의도가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는 사실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가 매번 내가 아파하는 것을 보면서도 반복적으로 상처를 주고 있다는 사실이며, 그런 상황으로부터 내가 나 자신을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다.(52)
분명히 해두어야 할 점은, 공감 능력은 높은 게 바람직한 것이다. 정서적으로 건강하기 위해서 가장 필수적인 요소 중 하나가 바로 공감 능력이며, 나르시시스트의 건강하지 않은 심리의 핵심 또한 공감 능력의 결핍이다. 이에 공감 능력 자체는 너무나 귀한 자질이지만, 나르시시스트가 공감 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을 유독 곁에 두고 싶어 한다는 사실이 문제이다.(301)
참 이상한 나의 언니는 모든 것을 애쓴다. 열심히 애쓰니까 당연히 성과는 따라와 준다. 언니는 프리랜서로 불규칙한 수익에 돈이 너무 없어 미래가 걱정되지만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요즘 일상의 잔잔한 행복을 느낀다고 말했다. 근데 나는 그런 말을 하는 언니의 이면에 외롭고 행복해 보이지 않는 언니가 존재하는 것 같다.
“언니 내가 왜 그렇게 싫었어? 나는 언니를 정말 좋아했는데, 왜 나를 싫어했어?”
“나도 어린데 어린애를 돌봐야 하니깐. 나도 아직 어린애인데 자꾸 챙겨야 하는 존재가 있으니깐. 네가 자꾸 사라지고 내가 찾으러 다니고, 그래서 싫었어.”
“언니, 근데 이제 나도 부담스럽던 언니마음 알아. 언젠가부터 내가 더 이상 언니에게 안 기대잖아. 내가 언니 옆에 없으니까 편하지?”
“네가 그렇게 멀리 떠날지는 나도 몰랐어.”
“언니, 나 서울 올라갔다가 중간에 언니 보려고 내려갔을 때 언니가 싫어했잖아. 그때 느꼈지, 아, 나는 더 이상 기댈 곳이 없구나.”
“언니도 언니 공간이 필요하거든.”
참 애쓰던 언니는 이제 옆에 기대던 가족들이 없어지면서 애쓰지 않아도 돌아가는 일상의 행복을 조금씩 느낀다. 근데도 애쓰는 게 습관이라 삶에 몸에 깊게 박힌 굳은살이라 더 이상 애쓰지 않아도 계속 애쓰며 산다.
언니, 애쓰지 마, 대충 살아. 이제는 대충 살아도 편하게 살 수 있다고, 시간이 지나 자기 한 몸 간수하기만 해도 되는 날이 왔으니까, 이제는 애쓰지 마 언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