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임없이 나를 용서하시는 하나님
기독교적 관점으로 봤을 때 인간은 모두 다 죄인이다. 자유의지를 가졌던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이브는 결국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했던 행동이었던 선악과를 따먹었고 이후 인간들은 태어날 때부터 죄인으로 태어났다. 나는 죄인이다. 수치스러운 인간이다. 하지만 인간인 우리가 스스로 죄인임을 알고 하나님께 고백하면서 하나님은 용서를 베푸시고 우리를 도울 수 있다.
고무나무 하나를 기르고 있다. 키우기가 쉽다고 물만 한 달에 한번 듬뿍 주면 잘 산다길래 데려왔는데, 우리 집에 데려오니 자꾸만 잎사귀가 떨어졌다. 자꾸만 잎사귀가 떨어졌다. 내가 물을 많이 줘서 그런가, 물을 자주 줘서 그런가, 물을 안 줘서 그런가, 잎사귀가 떨어졌다.
여행을 다녀왔더니 완전히 메마른 갈색의 고무나무를 발견했다. "죽었어." 남편이 말했다. 사실 그 고무나무는 죽어서는 안 되는 나무다. 아니 사실은 이미 죽었던, 잠깐이지만 함께 했던 강아지의 유골이 들은 화분이다. 분양받고 며칠이 지나지 않은 강아지는 전염병이 발견됐고 10일 동안을 앓다 결국 떠난 강아지를 묻은 고무나무, 그 나무가 "죽었어." 아이가 다시 죽은 것 같은 기분. 인터넷을 찾아보니 이미 시든 화분도 '저면관수'라는 용법으로 화분밑에 물을 채우면 뿌리에서부터 수분을 가득 채워 다시 살아난다는 글을 발견했다. 저렇게 죽게 놔두는 것보다 일단 한번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무대야는 없지만 큰 비닐에 물을 채워 화분을 삼 일간 물이 빠지면 다시 채우면서 수분보충을 시켰다. 조금씩, 조금씩 좋아졌다. 오로지 갈색이었던 화분이 가지부터 초록으로 물들었다. 그러다 새끼 잎사귀를 다시 하나하나 싹틔었다. 다시금 잎사귀로 화분이 채워지기 시작했다. 우리 집에 와서 매일 떨어지던 잎사귀가 다시 나니 다시 태어나는 기분이었다.
이런 고무나무를 옆에 두고 난 여전히 며칠치의 약을 한 번에 삼키고, 집에 혼자 있을 때 몰래 옥상에 올라가 밑을 한참을 바라보다 내려오고, 베란다 행거에 벨트를 연결하고 목을 걸었다 뺐다를 반복했다. 마지막 한걸음. 그 한걸음이 무서워서, 아쉬워서 아직 나는 살아있다. 수치스러운 인간. 다시 회복하는 생명을 옆에 두고 여전히 시들어가는 나.
세상을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자신을 부정적으로 바라본다는 혼란형 애착. 계속되는 부정은 삶을 부정적으로 만들고 자기 파괴적인 행동은 이어진다. 태어날 때부터 죄인인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방법뿐이다. 교회를 나가며 하나님께 늘 했던 기도, '저를 포기하지 않게 해 주세요.' 하나님께 기도하지만 끊임없이 나를 포기하려 하는 나를 용서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나를 무한히 사랑하시고 용서하시고 공동체 속에서 채워주신다.
내가 용서하지 못했던 무언가를 떠올린다. 먼저 세상의 기준에서 너무나 부족한 수치스러운 나 자신, 충분히 나를 사랑해주지 않고 보살펴주지 않았던 가난한 나의 부모, 어린 시절 늘 나와 함께 했으면서 나를 외면한 나의 언니, 그리고 나를 구해줄 것 같이 나타나곤 나에게 상처를 입힌 나의 남편, 그리고 다시 외로운 나.
난 나의 엄격함을 용서하려 한다. 아무것도 아니면서 세상의 기준에서 따지려고 했던 나, 그 엄격한 세상의 기준에 부합하지 못하는 나 자신과 타인들. 하나님은 이미 죄인인 나를 용서하였기에 나도 그들을 용서한다. 용서하지 않고서는 공동체는 회복할 수 없고, 사랑만이 서로를 치유할 수 있다.
그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마태복음 18:2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