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사람이 결혼을 했다. 아는 사람이 던진 부케를 받은 사람도 내가 아는 사람이다. 부케를 받은 사람이 얼마 전 자살을 했다. 결혼식장에서 그는 신랑과 신부 사이에서 사진을 찍었다. 내가 본 그의 마지막 사진이었다. 머릿속에서 신랑과 신부 사이에 있는 그가 사라진다. 여백을 남긴다.
누가 사라진 자리는 여백이 된다. 그 여백이 남은 이들에게 힘을 주기도 한다. 힘을 준다고 그렇게 쓴 시를 읽은 적이 있다. 시인은 어머니가 죽으면서 여백을 남겼는데 그게 슬픔이라 생각했는데 그게 슬픔만은 아니라고 적고 있었다. 여백이 사라진 자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니까. 그 추억이 위로가 되니까. 평화를 주니까. 아마도 사랑을 받았던 추억일 것이다.
나는 시인이 여백을 그렇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여백을 남긴 이가 자연사를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사고사라면 위로와 평화를 주기가 힘들다. 좋았던 모든 추억이 마지막 기억에 가려 슬픔과 아쉬움을 남긴다. 그리고 자살의 경우 백퍼센트 부모의 가슴에 묻힌다. 부모는 살아 있는 동안 무덤을 이고 다닌다. 좋았던 추억은 완전한 위로가 되지 못한다. 우리가 자연사를 해야 하는 이유다. '내 꿈은 자연사입니다.' 라는 제목을 가진 책을 보았다. 아직 읽어보진 못했지만 제목에 공감한다. 내 꿈도 자연사다.
반려동물은 인간보다 빨리 죽는다. 인간은 반려동물의 죽음을 여러 번 목격할 수밖에 없다. 점심을 먹고 산책을 하다가 개를 질질 끌고 다니는 노인을 만났다. 두 마리의 큰 개였다. 원래는 한 마리가 더 있었다고 한다. 그 개가 최근에 죽었다.
"얼마나 슬픈지 알아요? 개를 키울 땐 용기가 필요해요. 헤어질 용기. 그게 없는 사람은 개를 키울 자격이 안 돼요."
나는 개의 이름을 물었을 뿐인데 그분은 발걸음을 멈추고 내게 슬픔을 쏟아내고 갔다. 사라지는 그 분의 등을 보면서 생각했다.
"그 개는 가슴에 묻혔구나."
어깨가 처진 걸 보니 조금은 용기가 부족한 사람처럼 보였다.
고양이는 죽을 때 마지막 모습을 주인에게 보이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한다. 마당이 있는 집에서 살 때 고양이는 그렇게 했다. 그것은 고양이의 오랜 전통이었는데 아파트에 살게 되면서 그런 전통을 유지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래서 반대로 죽음을 앞 둔 고양이가 인간에게 안겨오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주인이 직장에 간 사이 자신의 죽음을 참고 있다가 주인이 퇴근해서 문을 열면 달려가 안겨 죽는 것이다.
김하나 작가의 고양이 고로가 얼마 전 죽음을 맞이했다고 한다. 소식을 듣고 일본에 있는 독자가 작가에게 보낸 편지를 읽었다. 거기 고양이를 돌보는 일본 사람의 목소리가 담겨 있었는데 너무나 인상적이어서 감동을 다 말할 수가 없다.
그들은 떠나간 고양이가 '투명 고양이'가 되어 곁에 있다고 생각한다. 가끔씩 투명 고양이에게 이름을 부르거나 말을 건다고 한다.
"정말 고마웠어."
"이제는 아프지 않아서 다행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