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에는 조깅을 한다. 길게는 하지 않는다. 짧은 거리를 뛰다가 온다. 꿈은 원대하다. 울산 태화강에서 열리는 울트라 마라톤에 참가하는 것이다. 울산에 사는 친구에게 미리 알려주었다. 언젠가 내가 그곳에 나타날 것이라고. 친구의 반응은 짧고 간명했다.
"진짜?"
몇 년째 못 만나고 있는 친구였다. 내가 그 대회에 참가하지 않으면 다시는 만나지 못할 친구일지도 몰랐다. 나는 이런 랜선 친구를 몇 명 갖고 있다. 전화도 하지 않고 가끔 문자로만 대화를 한다. 이런 관계가 점점 더 편해진다.
돌아와서 샤워를 한다. 원래는 이게 루틴이다. 나는 렛트의 화장실부터 챙긴다. 뚜껑을 연다. 냄새가 ‘퍽’하고 올라온다. 씻기 전에 삽을 든다. 흙을 퍼서 감자를 골라낸다.
과거에는 임금님의 볼 일을 '매화'라고 했다. 임금님의 화장실을 신하들이 들고 다녔는데 그것의 명칭은 '매화틀'이었다. 임금님이 볼일을 보면 건강을 살피기 위해 의원들이 그것의 맛을 보았다는데 나로선 못할 일이다.
고등학교 때 화장실이 급해서 손을 들었다.
"선생님 매화 좀 심고 오겠습니다."
"몇 송이나."
"다섯 송이입니다."
"얼른 심고 와라."
급한 정도를 송이로 표현했다. 센스 있는 선생님이었다.
나는 태어났다. 이것을 영어로 번역 하니 ‘I was born’ 이다. 이걸 직역하니 '나는 태어나졌다' 이다. 이걸 의역해서 '나는 태어났다'로 번역한다. 우리는 태어난 것이 아니라 태어나진 것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태어남을 당했다. 렛트도 태어남을 당한 것이고, 디라스도 그렇다.
사람들은 왜 태어나졌다고 하지 않고 스스로 태어난 것처럼 태어났다고 말하게 되었을까. 샤워를 하면서 생각한다. 물줄기를 하염없이 놓아두고 생각을 해봐도 뚜렷해지지 않는다. 태어났다고 하니 삶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에 내가 책임이 있는 것 같다. 내가 다 선택한 것 같다.
나는 왜 태어났을까. 렛트는? 디라스는? 삶에서 의미를 찾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사는 이유를 몰라서, 사는 이유가 없어서 우울증에 걸리기도 한다. 우주는 방향도 목적도 없다. 우주도 그런데 나라고 별 수 있겠는가. 나는 더 이상 의미 따위를 찾으려고 하지 않는다. 만들기 나름이다. 디라스를 만나기 위해, 다림이를 만나기 위해, 렛트의 똥을 치우기 위해서. 태화강에 가기 위해.
나는 왜 태어남을 당했을까? 질문을 바꾸니 답이 보인다. 렛트는 왜 그런 일을 당했을까? 디라스는? 삶에서 벌어지는 불편함을 만들어준 이가 누군지 알 것 같다. 그 분은 당신이 탄생시킨 모든 것에 대해 사랑을 말한다. 사랑해서 낳은 거고, 나 혼자 외로울까 다른 이를 낳은 거라고. 이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우리를 먼저 사랑했다고 한다. 그 분이 자신을 사랑했던 게 아닐까. 그 분이 외로웠던 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