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아프지는 않았다. 따끔한 정도도 아니었다. 간지러운 정도였다. 묘한 쾌감이 있었다. 내가 좀 이상한 사람인가.
"크면 위험할 수도 있어요. 진짜 세게 물 수도 있거든요. 버릇은 고쳐야 해요."
"어떻게 고치는 건데."
"잘 고쳐지지 않아요."
"계속 물려야 하나?"
"그냥 피하세요. 습관은 고칠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친구 한 명이 특수교사다. 영어로 스페셜 티쳐라고 했다. 그렇게 말하니 뭔가 특별해보였다. 아무튼 그 친구는 몸이 불편한 학생의 집에 찾아가서 수업을 하고 오기도 하는 모양이었다.
학생 중 한 명은 공주처럼 행동했다. 엄마와 아빠를 부를 때도 이름을 불렀다.
“경수야 이리와!”
“선희야 저리 꺼져!”
이런 식으로 부모를 대했다. 교사인 친구는 그걸 두고 볼 수가 없었다. 그 학생을 고쳐보려고 한 모양이다. 그걸 보고 어머니가 말했다.
"전 괜찮아요. 아이가 살아 있는 동안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마음대로 살다갔으면 좋겠어요. 최대한 자유롭게."
부모들은 흔하고 흔한 것이지만 그들의 사랑은 본질적으로 같다. 많은 돈을 아이에게 물려주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찾아내는 부모들도 결국 아이가 마음대로 살아갈 수 있게 자유를 주기 위함이라고 생각한다.
디라스는 렛트의 버릇을 고쳐주고 싶어 한다. 여기저기서 방법을 알아보고 있다.
나는 렛트에게 최대한의 자유를 주고 싶다. 안 고쳐 주어야겠다는 것이 나의 결론이다.
디라스와 함께 살면서 나는 디라스와의 차이점을 여러 가지 발견했다. 디라스는 뚜껑을 열고나서 닫지 않는 습관이 있다. 화장품의 뚜껑, 음료수의 뚜껑. 간장 뚜껑. 그런 것들은 디라스의 손을 타면 잘 닫히지 않는다. 음식물이 남아 있어서 그걸 챙기려 하다가 몇 번 실수를 했다. 뚜껑만 잡고 들어 올렸다가 쏟아버리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디라스에게 뚜껑을 닫아달라고 한 적은 없다. 디라스의 습관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관성 같은 것이다. 계속 운동하려고 하려고 하기 때문에 뭔가에 부딪치면 불편해진다.
나는 디라스가 불편해지기를 바라지 않는다. 살던 대로 살아가게 하고 싶다. 그런 이유로 렛트의 습관을 고쳐주고 싶지 않다. 렛트가 그럴 때 그냥 물려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