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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렌 Aug 10. 2020

고양이라는 종교


  인도의 한 성자에게 고양이가 있었다. 그는 제자들과 함께 명상을 하였는데 그때마다 고양이가 돌아다니면서 명상을 방해했다.

  아시다시피 고양이는 우리가 무엇을 하는지 궁금해 하지 않으며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고양이는 돌아다니고 싶은 대로 돌아다니고 양옹 거리고 싶으면 양옹 거리고, 미옹 거리고 싶으면 미옹 거린다. 건드리고 싶은 건 다 건드린다. 눈을 감고 현실 저 밖의 신에게 영혼을 보내려는 제자들에게 여간한 소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성자는 제자들을 위해 명상하는 동안 고양이를 사원 밖의 기둥에 묶어 두기로 했다. 그 후로 명상은 고양이를 묶는 것으로 부터 시작했다. 하루하루 그러한 일들이 쌓이자 전통이 되었다. 전통이 된 것을 따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느 날 고양이가 죽었다. 제자들은 혼란에 빠진다. 마침내 고양이 없이 명상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신에게 이르기 위해서 그들에게는 고양이가 필요했다. 고양이는 이렇게 위대한 존재가 되고 말았다.      


  인도에는 이런 우화들이 많다. 많고 많아서 넘치고 넘친다. 그걸 읽는 재미가 쏠쏠한데 이런 생각도 든다. 이렇게 지혜가 많은 사람들이 왜 저렇게 살고 있지?

  언젠가 인도에 간 적이 있다. 하늘에서 내려온 물이라는 갠지스 강은 더럽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가난했고 지저분했고 위생 관념이 없었다. 아무데나 똥을 쌌다. 렛트처럼 모래 속에 묻지도 않았다. 화장실 벽에 처바르더라도 똥을 모래 속에 묻어 두면 치우는 사람이 편하다. 실수로 밟을 일이 없다. 인도의 그 어느 화장실보다 렛트의 화장실이 깨끗하다. 지혜란 이미 존재하지만 모두가 그 지혜를 맛보는 건 아닌 모양이다. 미래는 이미 와 있지만 널리 퍼져 있지 않은 것처럼.

  다른 동네도 있었다. 그곳은 강남이나 마찬가지인 동네였다. 빈부격차가 큰 나라라는 걸 실감했다. 그들도 죽으면 갠지스로 가려고할까. 장작 위에 몸을 올려놓고 자신을 불에 태울까. 몸이 불에 탈 때 눈 속에서 눈동자가 국처럼 끓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나는 방문을 닫아 놓고 책을 읽었다. 지금은 방문을 열어 놓고 책을 읽는다. 렛트가 방문을 열지 못하기 때문이다. 렛트가 내 방에 들어오는 것을 환영하는 것이다. 렛트는 기웃기웃하다가 내 책상 앞을 지나 낮은 스툴로 살짝 뛰어 오른다. 그리고 엎드려 잔다. 나는 책을 읽다가 렛트를 보다가, 렛트를 보다가 책을 읽곤 한다. 렛트가 내 방에 들어오지 않으면 귀를 기울이고 그의 위치를 가늠한다. 그의 발자국 소리가 이쪽으로 향하면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마음이 편해진다. 신앙심이 생긴다. 관습으로 굳어져 가고 있다. 분명하다. 내가 길들여지고 있다. 렛트가 사라져도 방문을 열어두게 될지 모른다. 그때쯤이면 렛트는 나의 종교가 될지 모른다. 나의 책읽기도 인도의 명상인들처럼 고양이 없이는 안 되는 일일지 모른다. 복종하고 싶은데 복종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유보다 달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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