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대 초반에 불과한 나의 어머니가... 이상하다.
2018년 겨울, 학생으로서의 마지막 방학은 본가에서 보내야겠다는 마음으로 고향에 내려갔다. 10년 만의 본가 생활이었다. 회사 입사는 19년 초로 확정되어 있었고, 더 이상 영어공부나 면접 준비를 하지 않아도 되었다. 내 생에 이렇게나 스트레스 내지 고민거리가 없는 기간이 있었나, 싶을 정도였다. 기껏해야 2개월가량 주어진 기간제 백수생활이었기에 온전한 휴식을 누리고 싶었고, 정말 아무런 생각 없이 어머니와 하루종일 TV 앞에 앉아있곤 했다.
우리 집 분위기가 원래 그랬다. 중학교 때부터 타지에서 기숙학교를 다녔던 나에게, 본가는 밥-TV-잠-밥-TV-잠의 루틴을 반복하는 곳이었다. 간혹 TV마저 재미가 없을 때면, 철 지난 예능 혹은 드라마를 배경음악처럼 틀어놓고 핸드폰 게임에 열중하기 바빴다. 그래봤자 한 달에 고작 이틀 정도였으니까.
그래서 초반에는 이상한 걸 느끼지 못했다, 정말로.
어머니는 원래부터 초저녁 잠이 많으신 분이었다. 9시만 되면 꾸벅꾸벅 조시기 일쑤였기에, 어제 봤던 일일드라마 '하나뿐인 내 편'의 내용을 기억하지 못하고 재방송을 보고 또 보시는 걸 알면서도 크게 개의치 않았다. '본방이 끝나기도 전에 자꾸 주무시니까 그렇겠지, 내가 지루함을 참고 재방송을 같이 봐드리기만 하면 되는 문제인데 뭐'라고 생각하며 아주 가볍게 치부해 버렸다.
꽤 오랫동안 다니시던 어린이집의 보육교사직을 갑자기 그만두셨을 때도, 사직(해고였을지도 모른다)의 이유를 면밀히 들여다보려고 하지 않았다. 이제 하나 있는 딸자식도 다 키우셨겠다, 특별히 돈 들어갈 곳도 없으니 굳이 고생스럽게 용돈벌이를 하실 필요가 없는 상황이었다. 어린이집의 일부 원생과 학부모들에 대한 어머니의 불만을 반복적으로 들어왔던 입장에서, 계속 스트레스를 받으시느니 차라리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같은 에피소드를 몇 번이고 되풀이해 말씀하셨던 것도 초기 증상 중 하나였던 것 같다.)
같은 공간에 함께 있는데도 주야장천 핸드폰 게임만 하던 나를 보며, 어머니는 야속함을 느끼셨을까? 종종 나에게 “재밌나?”라고 물어보셨을 때, 그때라도 어머니 눈을 마주치고 대화를 많이 했다면 좀 나았을까? 무심하게도 눈은 핸드폰에 고정한 채, “그냥 심심하잖아요. 어머니도 해보실래요?”라고 건성으로 대답하는 딸에게 어머니는 “아니~ 난 그런 거 못한다!”라고 하시면서 괜스레 당신의 통화목록과 문자 목록만 훑어보셨다. 그때 알았어야 할지도 모른다. 어머니의 인간관계가 이미 거의 단절 수준에 이르러 있었다는 것을.
처음으로 어머니의 상태에 의문을 가지게 된 건, 모바일로 쇼핑하는 법을 알려드렸을 때였다. 어머니께서는 스마트폰의 여러 기능을 곧잘 사용하셨을 뿐 아니라, 2000년대 초반부터 온라인 쇼핑을 즐겨 오셨기에 한 번만 경험해 보시면 금방 따라 하실 수 있겠거니, 하는 얄팍한 기대가 있었다. 정확하게 기억은 나지 않지만, 아마 필요한 물건을 검색하고 ‘구매하기’ 버튼까지는 직접 누르셨던 것 같다.
“이제 거기에 주소 입력하시면 돼요!”
“대신 좀 해도.”
“직접 한 번 해보세요! 이거 누르고 주소 입력하면 검색 돼요.”
주소를 입력하는 칸까지 띄워드렸는데도, 어머니는 뭘 망설이시는지 주소를 입력하지 않으셨다. 아니, 주소를 쓰지 못하시는 것 같았다. 갈피를 못 잡으시는 어머니의 모습에 가장 먼저 든 감정은 황당함에 가까웠다. 아니 15년 넘게 사신 집 주소를 못쓰시다니? 이게 말이 되나?
“우리 집 주소가 어떻게 돼요?”
“경상북도 경주시…”
황당함은 이내 당혹스러움으로, 다시 두려움으로 번져갔다.
‘타이핑이 어려우신가? 돋보기를 안 쓰셔서 키가 잘 안 보이셨을 수도 있을 거야.’
책상 서랍을 뒤져 종잇조각과 펜을 찾아왔다. 어머니에게 집 주소를 써 보시라 말씀드렸더니, 조금 쓰다가 멈추시고는 민망한 웃음을 보이시며 “내 주소 안다! 안 해도 된다!”라고 하시며 상황을 회피하려고 하셨다.
지금의 나는 안다. 거기서 멈췄어야 했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23살이었고, 어머니의 체면보다 당장 나에게 닥친 공포감을 해소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자존심 강한 어머니의 입장을 고려하기에 너무 어렸다고 하면 비겁한 변명일까.
“어머니 제 생일 말씀해 보세요.”
“니 생일을 와 모르노, 95년 10월 30일!”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불안감을 완전히 잠재우고 싶었던 나는 곧이어 다음 질문을 했다.
“아버지 생신은요?”
“...”
이쯤 되니 절망적이었다. 어머니의 20대 초반부터, 반평생을 함께 해 온 아버지였다. 나보다도 훨씬 오래전부터 챙기셨던 아버지 생신을 모르신다니 이건 말도 안 되는 악몽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하루종일 어머니를 붙잡고 어머니가 뭘 기억하시고 뭘 기억하지 못하시는지 확인하려 들었고, 어머니는 그런 나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어색한 웃음과 우는 소리를 번갈아가며 동원하셨다.
며칠간의 기억력 테스트 끝에 확인하게 된 어머니의 이상증세는 예상보다 훨씬 더 암담한 수준이었다. 집 주소, 생년월일, 전화번호와 집 비밀번호를 잊으신 건 새발의 피에 불과했다. 어머니께서는 이미 당신의 연세를 계산하기조차, 당신의 성함을 받아쓰기조차 버거워하는 반문맹 상태에 도달해 있었으므로.
어머니 연세 53세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