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로, 또 같이.
내가 그랬던 것처럼, 아버지도 어머니의 치매 증상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셨다. 어머니의 이상 증세를 확인하신 아버지께서는 우울증에 걸리면 '가성치매'라고 불리는 가역적 뇌 기능 저하나 기억력 감퇴가 발생할 수 있다며, 어머니가 갱년기인 데다가 우울증이 겹쳐서 그럴 거라 강변하셨다. 아버지는 “내가 네 엄마 옆에 있으면 다시 괜찮아질 거다.”라고 단호히 말씀하시고는 그 길로 곧장 휴직계를 내셨다. 쉬면서 어머니 돌봄에만 집중하겠다는 아버지 말씀에, 사실은... 굉장히 불안했다.
내가 곁에서 어머니를 관찰한 건 고작 2달 남짓이었음에도, 나는 이미 정신적으로 피폐해져 있었다. 무심한 딸이었던 내가 혐오스럽다가, 바로 다음 순간에는 어머니가 미친 듯이 미웠다. 뭐가 그렇게 급해서 벌써 그런 병에 걸렸느냐고, 왜 남들은 육십 중반이 넘어서야 걱정하는 병을 이렇게나 일찍 걸렸느냐고 따져 묻고 싶었다. 어머니를 실컷 미워하고 나면 자괴감이 밀려와 나 스스로를 증오하는 악순환이 반복됐다. 아직 치매로 진단된 것은 아니니 희망을 가져보자고 결심했다가, 도저히 다스려지지 않는 절망감과 어머니에 대한 연민으로 어린아이처럼 주저앉아 엉엉 울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내가 정신적으로 미성숙했던 부분도 분명히 있겠지만, 치매 증상을 보이는 가족을 마주하기란 상당한 정신력을 요하는 일인 것이다.
아버지라고 크게 달랐을까? 건방지지만 아버지도 나와 거의 동일한 심경 변화를 거치셨을 거라 감히 짐작해 본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대한 부정, 상황을 개선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 치료를 거부하는 어머니에 대한 안타까움,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과 우울함까지. 회사 입사를 포기할 수는 없었으니 결국 어쩔 도리 없이 아버지께 전권을 안겨드리고 상경했지만, 어머니를 돌보시느라 아버지의 건강마저 해치지 않으실까 염려스러웠다.
확실히, 아버지는 나보다 훨씬 좋은 보호자였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설득해 병원 진료를 보는 데에 성공하셨고, 2020년 9월에 드디어 약을 처방받을 수 있었다. 아버지가 보내신 카톡, ‘약 타 왔다.’라는 네 글자가 한 줄기 빛 같았다. 그래, 지금부터라도 치료가 잘 듣기만 하면 어머니의 병세가 더 악화되는 건 막을 수 있을 거야.
희망을 가진 것도 잠시, 또 다른 문제가 불거졌다. 아버지는 약을 먹이려고 하고, 어머니는 이를 거부하는 상황이 매 식사시간마다 반복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실랑이가 너무나도 스트레스였는지, 어머니의 증세는 날로 심각해져 내가 본가에 방문하는 날이면 “네 아빠가 나를 죽이려고 약을 준다”라고 말씀하시는 지경에 이르렀다. 치매의 전형적인 증상 중 하나인 망상이 시작된 순간이었다.
"원래 우리 나이 되면 지병으로 먹는 약 하나쯤은 생긴다. 봐라, 나도 고혈압 약 먹제? 이 약은 먹으면 뇌에 좋단다. 당신도 약 먹자."
"그렇게 좋은 약이면 니나 처먹어라."
"약 먹어야 더 안 나빠진다니까. 약 먹어라!"
"안 먹는다고 했다!"
처방약 중 8할은 쓰레기통에 처박혔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내가 어르고 달래다 기어이 화를 내고 나서야 약을 드시곤 했다. 부녀의 성화에 못 이겨 약을 복용하실 때면, 어머니께서는 서럽게 눈물을 흘리며 “그래, 내가 이거 먹어주면 되는 거제”라고 말씀하시고는 생을 포기한 사람처럼 행동하셨다. 사약받듯이 약을 삼키는 어머니의 모습에 슬프기도 했지만, 혼란스러운 감정이 더 컸다. 이게 치료가 되는 게 맞는 걸까? 오히려 나빠지는 게 아닐까? 아직까지도 확신이 없는 것을 보면, 아마 평생 알 수 없겠지.
망상 증세가 나타났을 때 즈음 나타난 또 다른 이상행동 중 하나는 ‘배회’였다. 불행 중 다행으로 어머니가 집 밖으로 나가서 배회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다만 집 안의 특정 구간을 계속해서 걸어 다니셨는데, 망상과 배회가 더해지니 아주 환장의 콜라보였다. 어머니는 계속 무언가를 중얼거리면서 집안을 돌아다니셨고, 가끔은 누군가와 대화를 하는 듯한 모습도 보이셨다. 게다가 혼잣말을 귀 기울여 들어보면 중간중간 아주 험한 욕들이 등장하기도 했다. 어머니를 당신만의 세계에서 끄집어내기 위해 ‘누구랑 대화하시냐’며 말을 걸어보기도 했는데, 어머니는 중얼거리시던 것을 뚝 멈추시고는 굳은 표정으로 입을 다물어 버리셨다. 무감정해져 버린 어머니 앞에서 나는 또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었다.
일요일 저녁이면, 나는 거의 도망치는 심정으로 기차에 올랐다. 그냥 이 상황이 눈앞에 보이지만 않아도 숨통이 트일 것 같았다. 아버지께서는 “엄마한테 잘해라. 엄마가 문제가 아니고 네가 나중에 후회할까 봐 얘기하는 거야.”라고 자주 말씀하셨지만, 나는 고작 48시간도 최선을 다하지 못하는 못난 딸이었다.
어머니는 종종 서울로 도망친 나에게 전화를 하셨다. 아니, 어머니의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고 하는 편이 옳겠다. 당신은 전화를 ‘거셨다’는 인지가 전혀 없으셨기에. 전술하였듯이 어머니는 누군가가 옆에서 핸드폰을 하고 있으면 당신도 핸드폰을 열어 통화목록을 들여다보셨는데, 그러다가 실수로 통화가 연결되는 경우가 잦았던 것이다. 전화가 걸려오면 정말 급한 일이 아닌 이상 하던 일을 멈추고 어머니와의 통화를 최우선으로 했다. 짧은 토막 대화 정도를 하고 끊는 날은 그나마 양반이었다.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는 채로, 하염없이 시간만 흘려보내시는 날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럼에도 나는 전화 연결이 될 때마다 최선을 다해서 큰 소리로 어머니에게 수화기 건너편에 내가 있음을 알리려고 노력했고, 그 노력이 무색하게도 어머니께서는 “엄마야, 이게 와 이러노” 라는 말씀과 함께 전화를 끊거나 방치해 두곤 하셨다.
그쯤부터 우리 가족은 셋 다 정상이 아니었다. 나는 출가해 있었으니 그나마 상황이 나은 편이었는데도 말이다. 하루는 회사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책상 밑으로 기어들어가서 숨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였다. 그와 동시에, 내가 통제할 겨를도 없이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나는 바로 정신과로 달려갔고, 그날 이후 나는 매일을 웰부트린과 자낙스에 의존하며 버텼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휴직 연장을 염두에 두고 정신과에 가셨던 아버지도 자살충동이 아주 높은 우울 상태라는 진단을 받으셨다고 한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걱정하지 않게 하기 위해 혼자 버텨내기를 선택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