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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_핑계의 이유

외할머니, 어머니 그리고 나.

by 두부맘 Mar 10. 2025

 2024년 한 해 동안 대한민국 사회를 꽤 오랫동안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이슈가 있다. 바로 ‘의대 확대’ 정책이다. (정치적 문제로 비화될 만한 이야기는 차치하고 넘어가고자 한다. 누가 옳은가를 논하려고 쓰는 글이 아님을 양해 부탁드린다.) 해당 이슈를 두고 펼쳐지는 논의를 보다 보면 항상 불거지는 쟁점 사안이 몇 있는데, ‘지역 의료 격차 해소의 필요성’도 그중 하나다.


 사실 나는 지방의 환자들이 수도권까지 원정진료를 가는 현상을 잘 이해하지 못했던 사람이었다. 수도권 의료의 질이 지방의 그것과 비교했을 때 현저히 좋다고들 하는데, 그 차이가 막상 내 피부에 와닿게 느껴진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머니의 치매를 겪으며, 환자의 가족으로서 소위 말하는 ‘빅 5’, 서울의 대형 상급종합병원을 보다 더 신뢰할 수밖에 없게 된 경험담을 써 내려가 보고자 한다.




 아버지는 휴직 후 매일 어머니와 시간을 보내는데도 어머니의 증상이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자, 우리 지역에 있는 한 대형 병원을 찾으셨다. 치매 진단에는 다양한 검사가 수반되다 보니 어머니의 비협조적인 태도가 큰 걸림돌로 작용했지만, 병원에서 최선을 다해 준 덕분에 뇌 MRI 촬영을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다. 당시 주치의는 뇌 MRI를 확인한 후에도 사진상 크게 문제 될 점이 보이지 않으며 이상 소견이 없다고 했다.


 아니, 뇌 사진까지 찍었는데 원인을 알 수 없다고? 쉽사리 납득이 가지 않았던 나는, 나대로 방법을 찾아보고자 서울에서 뇌 질환을 잘 보신다는 교수님들을 수소문했다. 가장 많이 추천받았던 분은 삼성서울병원의 모 교수님이었는데, 진료 문의 전화를 했다가 초진이 가능한 가장 빠른 날짜가 1년 3개월 뒤라는 얘기를 듣고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루하루가 귀중한 인지장애(그때까지만 해도 치매 ‘진단’을 받지 않았으므로) 환자에게 1년 3개월이라니요?’라고 생각했지만… 대학병원이 얼마나 바쁜지 잘 알고 있었기에, 그냥 입을 다물고 조용히 전화를 끊었다. 그다음으로 문을 두드렸던 곳은 바로 서울 아산병원이었는데, 다행히도 그곳에서는 몇 개월만 기다리면 진료를 볼 수 있다고 했다. 유선으로 초진 예약을 잡으며 ‘아마도 어머니가 치매인 것 같은데 현재 다니는 병원에서는 원인 불명이라며 아무런 처치를 받지 못하고 있다’고 답답한 마음을 내비쳤더니, 가지고 있는 자료가 있으면 지참해 내원하라는 안내를 받았다.


 병원에서 진료를 받는 시간은 늘 대기하는 시간에 비해 허무할 만큼 짧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교수님께서는 아버지가 가지고 오신 뇌 MRI 사진을 보자마자 결론을 내렸다.


 “이미 다 쪼그라들었네. 여기가 원래 이렇게 비어있으면 안 돼요. 여기도 그렇고 여기도 위축이 와서 쪼그라든 거 보이시죠?”

 믿을 수가 없었다. 분명 경주에서는 똑같은 사진을 보고도 이상 소견이 없다고 했었다고요!


 첫 문장이 너무 충격적이었던지라, 뒤에 말씀해 주신 내용은 잘 기억이 나지 않고 흐릿하다. 대강 어머니의 치매는 알츠하이머병이 원인이며 집안 내력 등을 고려했을 때 유전성 같지는 않다는 얘기를 들었던 게 기억난다. 유전이 아니면 발병 원인이 무엇이느냐고 묻자, 물리적 혹은 정신적으로 크게 충격을 받는 사건이 있었거나 우울증 등으로 낮은 수준의 사회 활동을 하는 경우에도 알츠하이머가 진행될 수 있다고 했다.


 병원을 나오면서 아버지께서는 “기계 좋다고 홍보하는 거 다 필요 없다. 기계가 아무리 좋아봤자 판독하는 사람이 실력이 없으면 말짱 꽝이다.”라고 한탄하셨고, 나 역시도 허탈함을 감출 수 없었다. 상황이 그 지경이 될 때까지도 지역 병원에서 준 ‘뇌에는 문제가 없다’는 소견을 곧이곧대로 믿었기에, ‘어쩌면 어머니의 증상이 일시적인 병증이며 회복이 가능하지 않을까’하는 일말의 희망이 있었던 거다. 서울 아산병원에서의 진료는 우리 가족의 기대를 완전히 무너뜨린 걸 넘어서서, 이제는 눈을 뜨고 현실을 똑똑히 직면하라고 엄포를 내리고 있었다.




 알츠하이머는 통상적으로 65세 이상의 고령자에게서 나타난다고 한다. 나의 어머니에게 이 무서운 병이 10년도 더 일찍 찾아온 데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기억을 되짚어 보면 아마 외할머니께서 작고하셨을 때의 충격이 너무나도 크셨던 게 아니었을까 싶다. 외할아버지는 내가 초등학생 시절 일찌감치 타계하셨기에, 외할머니가 돌아가심과 동시에 어머니는 심적으로 의지할만한 어른을 모두 상실해 버리셨던 거다.


 어머니께서는 가끔 펑펑 울며, “나는 이제 엄마아빠도 없는 고아”라는 말씀을 하시곤 했다. 사실, 당시에는 어머니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어머니는 이미 지천명에 가까운 어른인데, 무슨 다 큰 어른이 ‘고아’라는 표현을 쓰는지 납득이 되질 않았다. 말 그대로 고아의 ‘아’ 자는 ‘아이 아(兒)’ 자가 아닌가.


 게다가, 내가 그렇듯 어머니도 그다지 살가운 딸이 아니었다. 외할머니께서 병원에서 지내시던 시절, 주말이나 명절연휴가 되면 아버지께서 먼저 외할머니를 찾아뵙자고 제안하셨지만, 의외로 어머니께서 이를 거절하시곤 했다. 주중에는 일을 하느라, 명절에는 시(나의 친가)에서 차례 음식과 손님맞이를 하느라 피곤해서 휴일은 집에서 쉬고 싶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그 모습을 지켜봐 온 나는, 외할머니께서 돌아가신 후 힘들어하시는 어머니의 감정에 깊게 이입하지 못했다. 어머니는 당신을 온전히 이해하고 공감해 주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에 더욱 좌절하셨을 테다.


 요즈음, 내가 어머니의 입장이 되어보니 이제야 이해가 간다. 어머니가 자꾸만 말라가고 점점 더 기력이 없어지는 데다가 가끔은 아예 정신을 못 차리고 꿈속을 헤매시는 것을 보면 나 스스로를 지킬 수 없을 것 같아 자꾸 외면하고 만다. 치매 환자들은 보통 대화의 내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분위기를 감지한다기에 어머니 면회 중에는 어떻게 해서든지 눈물을 참고 밝은 척을 하곤 하는데, 돌아 나오는 길에는 길바닥에서 눈물을 쏟기 일쑤다. 아버지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것이 아버지의 속을 상하게 하는 것임을 알면서도 감정 제어가 잘 되질 않는다. 한 번 찾아뵙고 나면 한동안 우울감이 지속되니, 자주 찾아뵈어야 한다는 걸 머리로는 알면서도 행동에 옮기기가 쉽지 않다.


 어머니는 계속 외로우셨을 거다. 아마 지금도 계속 외로우실 거다. 못난 딸은 그 마음을 알면서도 거리가 멀어서, 만삭이라서, 폭설이 내려서 등의 핑계를 가져다 붙이며 합리화를 한다. 오늘도, 내일도, 앞으로 평생 어머니를 찾아뵙지 않는 모든 날에 나는 핑계를 준비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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