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손가락은 나를 가리키고 있었고, 유일하게 사랑의 작대기가 서로 짝을 이룬 순간이었다. 잠시 정적이 흘렀고, 곧이어 '오~~'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뒤이은 순서가 있었지만, 지목을 포기한 사람도 속출했다. 결국 여섯 명의 미팅 자리에서 서로의 호감을 확인한 건 나와 그녀뿐이었다. 지목 게임 이후 우리는 다시 어색해진 자리를 빠르게 마무리하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 춥진 않았지만, 밤 12시가 넘어간 시간이라 어스름했다. 휘황찬란한 번화가의 불빛도 점차 빛을 잃어가고 있었고, 길거리엔 술 취한 몇몇의 취객들이 걸음을 비틀대고 있을 뿐이었다. 친구들은 자꾸 내 등을 그녀 쪽으로 떠밀었고, 못 이기는 척 그녀 옆에 다가섰다. 다른 여자들도 눈치채고는 슬며시 뒤로 빠졌다. 나는 헛기침을 하며 그녀에게 물었다.
"음, 집이 이 근처라고 했지? 그럼 어디 쪽이야?"
"아, 저쪽으로 조금만 가면 돼. 나 혼자 갈 수 있어."
"친구들도 다 흩어졌으니까... 저기 앞 큰길까지만 같이 걷는 게 어때?"
"응, 그러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잠시동안 뚜벅뚜벅 걷기만 했다. 이대로면 그냥 헤어지고 말 것 같아 조급한 마음에 서둘러 말했다.
"저기... 번호 좀 알 수 있을까?"
"응."
혹시나 거절할까 봐 조심스레 말했지만, 그녀는 흔쾌히 손을 내밀었다. 나는 빠르게 그녀의 손에 내 핸드폰을 쥐어 주었다. 이제 실낱같은 끈이 생겼다는 사실에 기분이 들떴다. 그러다 문득 궁금증이 생겨서 허튼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근데, 왜 나 지목한 거야? 진짜 그럴 줄은 몰랐거든..."
"그냥... 그중에 젤 나은 것 같아서. 오빠는 왜 나 지목했어?"
"어? 글쎄... 손가락이 그냥 움직이더라고. 하하."
뭔가 특별한 대답을 기대하고 있던 내가 바보였지만, 되돌아오는 질문에 부끄러워 얼버무리고 만 내가 더 머저리 같았다.
"오빠, 난 이제 일로 쭉 가면 돼. 데려다줘서 고마워."
가로등이 환하게 비치고 있는 사거리에 멈춰 선 그녀는 어스름한 골목길을 가리켰다. 나는 뭔가 오는 길 내내 분위기를 망치기만 한 것 같아서 찜찜했지만,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어, 그래. 잘 들어가고... 연락할게!"
"응, 조심히 들어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시원섭섭했고, 친구들에게 온 무수히 많은 메시지와 관심들도 잠시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택시 안에서 눈을 감고 오늘 있었던 일들을 되새겨 보았다. 그리고 나선 곧바로 그녀에게 카톡을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잘 들어갔어? 혹시 내일 주말인데 뭐 해?
너무 대놓고 물어보나 싶었지만, 그녀를 놓치기 싫은 내 마음이 조급해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에게서 답이 왔다.
오빠는 잘 들어갔어? 근데 나 내일 회사 가는데...
분명 공무원이라고 들었는데, 금요일 새벽까지 놀고선 다음날 토요일에 회사를 간다는 그녀의 답변이 나에겐 정중한 거절로 느껴졌다. 너무 들이대는 게 문제였던 것 같아 잠시 뒤로 물러나기로 마음먹었다.
그래? 그럼 다음에 연락할게...
저녁에는 시간이 되는데, 오빠가 우리 회사 근처로 올래? 내가 저녁 살게.
뒤이어 온 그녀의 답은 내 엔도르핀을 솟구치게 만들었다. 집에 도착한 나는 새벽이지만 침대에서 방방 뛰어댔다. 그러다 마음을 추스르고 카톡을 계속 이어나갔다.
그래? 회사 어딘지 알려주면 시간 맞춰서 나갈게.
응, 오늘 늦었으니까 푹 자고, 내일 봐.
그래, 잘 자!
마무리가 나쁘지 않았다. 그녀도 내게 호감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내일은 조금 더 나다운 모습을 보여줘야겠다고 생각하다가, '나다운 모습이 뭐지?'라는 의문을 안은 채 깊은 잠에 들고 말았다.
다음 날 저녁 만나기로 한 시간보다 조금 이르게 그녀의 회사 앞으로 나갔다.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어 마음 편하게 갈 수 있었다. 첫 만남보다는 부드러운 분위기를 위해 나름 편안하면서도 신경을 쓴 듯한 남색 니트를 입었다. 게다가 생각보다 옆에 섰을 때 그녀의 키가 크게 느껴져 굽이 있는 신발을 신게 되었다. 깔창을 껴야 하나 살짝 고민했지만,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서 그만두었다. 회사 앞에서 조금 서성대고 있으니, 그녀가 사원증을 맨 채 웃으며 건물 현관에서 나오고 있었다. 나도 밝게 웃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일이 얼마나 많길래 주말까지 출근해?"
"일찍 왔네, 평일에 다 못 끝낸 게 있어서."
"그럼 이제 오늘 일은 다 끝난 거야? 저녁 먹으러 가면 돼?"
"응, 오빠가 여기까지 왔으니까, 내가 치맥 살게. 여기 근처에 맛있는 치킨집 있어."
처음의 딱딱했던 분위기와는 달리 두 번째 만남은 나름 순조롭고 편안했다. 그래도 조금은 친분이 쌓인 탓일까. 그녀가 안내해 준 치킨집에 들어가 우린 정식으로 우리를 소개하고 있었다. 처음 술자리에서는 엉겁결에 이런저런 포장된 모습을 즉각적으로 비췄다면, 지금은 편안하지만 정돈된 모습으로 각자의 삶을 조곤조곤 이야기했다. 회사 근처에서 일 끝나고 만나서 그런지, 회사 얘기가 먼저 자연스레 오가기 시작했다. 내가 물었다.
"어쩌다가 공무원을 하게 된 거야?"
"아무래도 여자가 오래 일할 수 있는 게 공무원인 것 같아서.... 대학교 때부터 과생활 안 하고 공무원 시험만 준비했어."
그녀의 일을 오래 하고 싶다는 말이 이때는 그저 '깨어있는 여성이구나'라는 생각만이 들었다. 여러 대화를 나누고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법학과를 나왔고 나와 비슷한 시기에 공무원에 합격하여 입사하였으며, 공무원 시험 준비하느라 남자친구를 사귀지 못해서 최근에 여러 소개팅 자리에 나갔다는 것이다. 그중 하나가 우리의 첫 만남이었다. 나 또한 내가 살아온 얘기들을 쭉 풀어놓았다. 수능을 보지 않고 대학에 간 스토리, 법학과가 궁금해할 공대생 이야기, 취업해서 엔지니어로 일하고 있는 회사 생활 등이었다. 살짝 그동안 해온 연애 얘기들도 나왔지만, 그리 깊게 말하지는 않았다.
우리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서로에 대해 알아가고 있었다. 맥주가 한, 두 잔 들어가고 배가 부르자, 그녀가 피곤해하는 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집에서 푹 쉬고 온 나보다 주말에도 일을 하고 온 그녀의 피로도는 급격하게 올라갔으리라. 아쉽지만 오늘의 만남은 여기서 마무리하는 것으로 제안했다. 그녀는 미안해했지만, 난 그럴 필요 없다고 했다.
"다음엔 서로 푹 쉬고 만나서 하루 종일 놀자."
그렇게 난 또 그녀와의 다음 만남을 자연스레 기약했다. 그녀도 오늘까지의 나와의 만남이 그리 싫지 않은 듯했다. 아니, 이젠 서로 '썸'이라고 불러도 될 것 같았다. 그녀가 답했다.
"응, 그러자. 어쩌다가 술자리만 했는데, 다음엔 영화도 보고 카페도 가는 걸로!"
그녀가 말한 코스는 곧바로 다음 주 주말 우리의 데이트 계획으로 잡혔고, 나는 슬슬 고백 타이밍을 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