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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똥이애비 Feb 03. 2024

그녀를 처음 만났다.(1)

제 아내는 흙수저 출신입니다.(ep.1)

  그녀를 처음 만난 건 스물여덟 겨울이었다. 겨울이지만 나름 멋 부린 코트를 여밀 만큼 춥지는 않았다. 초등학교 동창 모임에서 급격히 친해진 우리 셋은 번화가의 신호등 앞에 서 있었다.


"야, 고맙다. 이런 자리도 만들어주고."

"뭘, 서로 니즈가 맞았던 거지, 그쪽도 세 명으로 맞춰서 나온대."

"예쁘겠지?"

"사진 보여줄까? 여기서 맨 왼쪽에 있는 애가 내 친구고, 여기 있는 나머지 둘이랑 같이 나온대."

"오오~ 괜찮아, 괜찮아! 야! 일로 와봐! 사진 좀 봐봐."


나머지 한 친구는 멀찍이 번화가의 분위기를 스캔하고 있다가 나의 부름에 가까이 다가왔다. 묵묵히 고개만 끄덕이는 친구도 내심 그녀들의 외모가 마음에 든 것 같았다. 하지만 우리는 사진에 속을 대로 속은 이십 대 후반의 남자들이기 때문에 실제로 만나봐야 안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아도 속으로는 모두 알고 있다.


"그래서 언제 온다는 거야?"

"잠깐만. 7시까지 오기로 했는데... 연락해 볼게!"


친구의 전화 통화를 기다리던 우리 둘은 잠깐의 틈을 타 이번 미팅이 잘 성사되지 않으면 어디로 놀러 갈지를 찾아보고 있었다. 스물여덟 직장인 솔로들의 주말 밤은 자유의 시간이지만 매우 짧기 때문이다.


"얘들아, 이미 여기 근처 룸술집에 앉아있다는데?"

"뭐야, 저녁도 같이 안 먹고 바로 술집으로 간 거야?"

"그런가 봐! 빨리 가보자."



  룸 술집에 들어선 우리는 왁자지껄하고 복잡한 술집 분위기에 압도되었다. 우리는 빠르게 일행이 있다고 설명하며 직원의 안내를 받았다.


"아, 저쪽 8번 룸으로 가시면 됩니다."


 우리는 직원의 안내에 고맙다는 표현을 하고는 구석에 칸막이가 쳐진 룸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긁지 않은 복권의 첫 번째 숫자를 확인하기 직전이 그렇듯 우리 모두는 똑같이 설레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이 미팅 자리를 주선한 친구가 문을 드르륵 열었고, 우리 여섯은 서로 눈이 마주쳤다.


  나 또한 마찬가지로 세 명의 여자를 빠르게 스캔하고 있었다. 그러다 한 여자가 돌아가는 내 눈을 잠시 멈추게 했다. 그녀는 어깨에서도 한 뼘 더 내려오는 긴 생머리에 구릿빛 피부를 갖고 있었다. 그녀가 입은 흰색 셔츠는 뚜렷한 이목구비를 더욱 돋보이게 만들었다. 게다가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있다고 하더라도 옆 친구들에 비해 앉은키가 훨씬 커서 더 눈에 들어왔다. 그동안 여자를 만나던 내 짬밥으로 보았을 때 키가 168센티 이상은 넘는 듯했다. 우리는 빠르게 스캔하던 눈을 거둬들이고 자리에 앉아 인사를 나눴다.


"안녕하세요. 빨리 오셨네요. 저희는 안 오신 줄 알고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거든요."

"아, 네. 서로 앉아서 보는 게 더 편할 것 같아서요. 저희가 약속 장소를 멋대로 정해서 죄송해요."

"아닙니다! 술집에서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데요. 하하."

"식사를 아직 못하셨죠? 여기 도시락도 있고 라면도 있어요."

"네, 일단 같이 메뉴를 골라보시죠."


운이 좋게도 난 그녀의 맞은편에 마주 보며 앉을 수 있었고, 얘기를 나누며 애써 의식하지 않는 척 몇 번을 훔쳐보았다. 내가 좋게 본 첫인상이 맞는지를 반복해서 확인하는 작업이었다. 이 자리를 주선해 준 내 친구와 그의 대학교 여자 후배는 먼저 자기소개를 하며, 어색한 분위기를 끌어주었다. 여자들은 고등학교 절친들이라고 했고, 나이는 우리보다 한 살 어린 스물일곱이라고 했다. 우리가 최근 초등학교 동창 모임에서 만나서 다시 친해지고 있다고 말하니 여자들은 놀라는 눈치였다. 얘기를 나누면서 그녀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는데, 도도한 외모와는 달리 목소리에는 애교가 넘쳐흘렀다. 예전에 유명했던 방송인 '현영'과 유사한 목소리였다. 이 또한 나에겐 매력으로 다가왔다.



  음식과 술이 나오고 어느 정도 배를 채운 우리 여섯은 본격적으로 서로를 알아가기 시작했다. 술게임을 하며 더욱 분위기를 활기차게 끌어올렸다. 이십 대 초중반에 이미 마스터한 게임들이라 별 다른 설명 없이도 모두가 익숙하게 게임에 임했다. 다른 점은 그때는 몇 시간이고 게임만 해댔다면, 지금은 10분 정도 게임을 하고 이야깃거리가 생기면 잔잔하게 서로를 알아가는 시간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정말로 3년 이상을 연애한 적이 있어요? 왜 헤어졌어요?"

"실례지만, 지금은 무슨 일 하세요?"

"아! 저도 여행 가는 거 좋아하는데. 어디가 제일 좋았어요?"


이런 식으로 질문이 꼬리를 물며, 각각 과거에 살아온 삶으로 어떤 사람인지를 나름 판단하고 있었다. 술도 어느 정도 취하고 분위기도 달아올라 서로 말을 편하게 하기로 했다. 첫 만남이지만 아무래도 존댓말을 하면 예의를 차리느라 좀 더 깊은 대화를 나누기는 어려울 테니 말이다.


"주량이 어떻게 돼?"

"연애 몇 번 해봤어?"

"혹시 여기서 마음에 드는 사람 있어?"


누군가의 눈치 없는 마지막 질문은 친해졌던 분위기를 다시금 어색하게 만들었다. 주선자 친구는 애써 분위기를 다시 회복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지 말고 우리 마음에 드는 사람 한 명씩 지목하고 깔끔하게 헤어지면 어떨까?"

"그래, 그래. 마음에 드는 사람 없으면 지목 안 해도 되는 걸로 하고..."

"순서는 가위바위보로 정하자."

"좋아, 마지막 게임이네."


가위바위보를 한 결과 하마터면 내가 첫 번째 순서가 되었다. 지금까지 그녀와 나 사이에 별다른 신호가 없어서 확신이 들지는 않았지만, 두 눈 딱 감고 그녀를 지목했다. 친구들의 '오~~'소리가 들려왔다. 순서대로 남은 인원들이 지목했고, 사랑의 작대기는 갈리기 시작했다. 드디어 그녀 차례가 다가왔고, 모두가 그녀의 손가락을 주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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