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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똥이애비 Mar 02. 2024

그녀가 내게 숨기고 있는 것(2)

제 아내는 흙수저 출신입니다.(ep.5)

  갑작스러운 그녀의 고백은 나를 무척이나 당황하게 했다. 가 들은 말이 정말 내가 생각한 게 맞는지 확인이 필요했다. 수 십 가지의 질문들이 떠올랐지만, 우선은 아무 말하지 않고 그녀를 조금 더 감싸 안고 있는 것이 좋을 것이라 생각했다. 점차 그녀가 진정하는 게 느껴졌다. 그녀는 고개를 들고 술로 인해 풀린 눈으로 나와 눈을 맞추려 애썼다. 내 반응을 살피는 듯했지만, 나는 당황한 내색을 하지 않고 무슨 말이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는 자세로 가만히 그녀의 눈을 쳐다보았다. 그녀가 마침내 입을 뗐다.


"나... 이혼 가정이야. 어렸을 때부터 아빠가 없었어..."


어느 정도 상황이 파악된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힘들었겠네... 지금은 괜찮아?"


"응, 지금은 없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해... 나한테 못된 짓을 많이 했었거든. 그나저나 오빠는 깜짝 놀랐겠다."


"아냐, 난 아무래도 상관없어... 근데 전혀 몰랐다."


"모를 만 하지, 내가 원래 티를 잘 안내잖아."


눈에 눈물이 그렁한 채로 웃는 그녀의 모습은 안쓰러우면서도 사랑스러웠다. 정확한 사정을 알고 싶었지만, 그녀가 먼저 말해줄 때까지 참고 있기로 했다. 나는 그녀에게 물을 건네주었다.


"목마르겠다. 물 좀 마셔. "

"응, 고마워."


물을 한 잔 들이켠 그녀는 취기가 좀 가셨는지 눈이 말똥 해졌다. 그녀가 이어서 말했다.


"엄마가 나 키우면서 혼자 고생 많이 하셨거든. 원래 가정주부셨는데 갑자기 가계 수입이 없어지니까 이런저런 식당일 밖에는 못하는 거야."


"어머니도 고생 많으셨겠다."


"그리고 난 결심했지. 여자가 안 잘리고 혼자 오랫동안 밥벌이 할 수 있는 일을 해야겠다고. 그래서 공무원을 꿈꿔왔던 거야."


"기특하네. 꿈을 이룬 거잖아."


공무원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했던 어린 시절의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녀는 이제 어느 정도 마음을 추스르고 담담해진 것 같았다. 술도 좀 깬 듯했다.



  밤이 늦어 여느 때와 다름없이 그녀를 바래다주는 길. 조금만 더 가면 늘 우리가 헤어지던 사거리의 가로등 불빛이 보일 듯했다. 그녀는 천천히 걸으며 내게 말했다.


"오빠도 오늘 깜짝 소식에 많이 놀랐을 텐데... 위로해 주고 이해해 줘서 고마워."


"그러려고 남자 친구가 있는 거지 뭘... 앞으로 더 힘든 일 있어도 얘기해야 해. 내가 들어주는 건 기가 막히게 잘하거든."


그녀는 걷다가 뭔가 결심한 듯 돌아서서 내 양손을 맞잡고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그럼, 나 오늘 집까지 바래다 줄래?"


나는 성큼 앞으로 다가서며 그녀를 보고 환하게 웃었다.


"물론이지."


우리의 거리는 훨씬 더 가까워져 있었다. 몸과 마음 모두. 그렇게 평소 헤어지던 사거리를 지나 어두컴컴한 골목길로 우린 함께 걸어 들어갔다. 겉에서 보던 것과 달리 골목길 안쪽은 생각보다 좁고 경사가 높았다. 성인 남자인 나도 숨이 가쁠 정도였다. 겹겹이 쌓인 옛 구식 빌라들이 마치 빠져나오기 힘든 미로를 만들 듯 아무렇게나 서 있었고, 그녀의 능숙한 안내로 우리는 쉽게 스쳐 지나갈 수 있었다. 나란히 걷던 그녀가 시선은 앞을 유지한 채로 말을 이어갔다.


"힘들지...?"

"아냐, 근데 생각보다 더 어둡고 높이 올라가네."


남자인 내가 혼자 다녀도 좀 무섭겠다는 생각이 들던 찰나에 안심 귀갓길 표지판과 방범용 CCTV가 눈에 들어왔다. 그동안 그녀는 얼마나 오래 이 길을 지나다녔을지 문득 궁금해졌다.


"이 동네서 언제부터 살았던 거야?"


"엄마가 아빠랑 이혼하고 다른 데 좀 있다가... 나 중학생 때 엄마랑 여기로 이사 왔어. 십 년 넘게 살고 있네."


"그래, 꽤 오래됐네..."


중학의 그녀가 이 길을 오갔을 거라 생각하니 안쓰러우면서도 대견한 마음이 들었다. 사거리에서 한 십 여분동안 걸어 올라갈 때쯤 그녀가 한 집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야. 엄마랑 난 저기 2층에 살아."


그녀가 가리킨 집은 회색 벽 현관문이 유리로 된 3층짜리 구식 빌라였다. 반지하까지 하면 7세대 정도 사는 듯했다. 그녀가 말한 2층에는 불이 들어와 있었고, 이내 그녀가 속삭이듯 말했다.


"집에 엄마 있나 보다. 집까지 바래다줘서 고마워."


그녀는 살짝 내 입술에 입을 맞췄다. 나도 덩달아 속삭이며 말했다.


"아냐, 이젠 내가 계속 집까지 데려다줄게."


언제 울었냐는 듯 밝게 웃어준 뒤 손을 흔들며 집으로 들어가는 그녀를 보고선, 나는 언제고 그녀의 상처를 감싸 줄 것이라 다짐했다. 그녀와 올라왔던 길을 다시금 되짚어 내려가면서 그녀의 어린 시절을 상상해 보았다. 내 과거도 쉽진 않았지만, 그녀의 과거는 아직도 아물지 않은 상처로 남아 있었다. 아직은 내 과거를 그녀에게 알릴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조용하고 어둑한 골목길은 내 뒤로 빛을 잃은 채 잠식되어 사라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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