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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똥이애비 Feb 17. 2024

완벽한 하루, 그러나...

제 아내는 흙수저 출신입니다.(ep.3)

  세 번째 만남에선 더 이상 '썸'으로만 끝내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오늘만큼은 꼭 고백을 해서 더 깊은 사이가 되고자 했다. 두 번째 만남에서 그녀가 제안했던 코스를 내가 조금 다듬어서 오늘의 특별한 주말 데이트 코스는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 일단 오전에 그녀 집 근처에서 만나 영화를 보기로 했다. 영화관에서 만나기로 하고 약속 시간보다 조금 일찍 나가 그녀를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오빠! 빨리 왔네."


밝게 웃고 있는 그녀 모습을 보는 게 이젠 더 이상 어색하지 않았다. 그녀의 모습도 오늘만큼은 조금 달라 보였다. 길게 늘어뜨린 흑빛의 머리카락은 차분하게 어깨 뒤로 내려와 있었고, 검은색 코트와 원피스는 마른 그녀의 몸을 더욱 가녀리게 만들었다. 나를 배려한 굽이 높지 않은 검은색 구두에서는 그녀가 다리를 움직일 때마다 이따금 반짝하며 빛이 났다.


  우리는 팝콘과 콜라를 사서 어두컴컴한 영화관 안으로 함께 들어갔다. 영화가 시작되기 전 광고가 나오고 있었고, 우리는 나란히 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벌써부터 팝콘에 손이 가고 있었다. 살짝살짝 스치는 그녀의 손길이 내 마음을 설레게 만들었다. 드디어 영화가 시작되고 주변은 더욱 어두워졌다. 우리는 슬슬 먹던 팝콘을 내려놓고 영화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아니, 나만큼은 그녀의 손에 더 집중했다. 그녀의 손은 무릎 위에 다소곳이 올라와 있었다. 내 손은 팝콘을 먹으며 바쁘게 움직이다 어색하게 팔걸이에 안착해 있었다. 영화 내용이 그다지 기억나지는 않지만, 분위기가 무르익어 갈 때쯤 천천히 내 손을 그녀 쪽으로 뻗어 무릎 위에 있던 그녀의 손과 맞잡았다. 부드럽고 따뜻했다. 온 신경이 내 손에 집중되어 마치 손안에 심장이 있는 듯 두근댔다. 그녀는 아무런 동요 없이 내 손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영화가 끝날 때까지 우리는 손을 잡고 있었다.



  그녀는 이 동네에서 어렸을 때부터 쭉 살았다고 했다. 예전엔 이만큼 번화가가 아니었는데, 개발이 이뤄지고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서 상권도 크게 발달했다고 했다. 그러나 그녀는 고등학교 때부터 친구들과 자주 가던 개발되지 않은 시장 뒤편의 주꾸미 골목이 가장 정겹다고 했다. 우린 그중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주꾸미 가게로 갔다. 어느새 잡고 있던 손이 풀어지며 그녀의 손이 내 팔 안으로 들어와 팔짱을 낀 채로 걸어갔다. 물리적 거리가 가까워진 만큼 심리적 거리도 좁혀졌다. 도착한 가게 안은 아직 80년대를 벗어나지 못했다. 새와 산이 그려진 오래된 원형 테이블과 등받이 없는 동그란 의자, 테이블 위엔 불판이 놓여 있었고, 불판 위로는 환기통이 하나씩 설치되어 있었다. 마치 실내 포장마차를 연상케 했다. 사람들의 왁자지껄 소리가 들려왔고, 넓지는 않지만 낮인데도 자리가 거의 다 차 있었다. 내가 낯설게 둘러보며 말했다.


"조금만 늦었으면 기다릴 뻔했네. 엄청 맛집인가 봐."

"응, 여기 진짜 맛있어. 그나저나 주꾸미 괜찮아?"


나는 별로 주꾸미를 찾아서 먹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싫어하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가 좋아한다고 하니, 나도 좋다고 했다. 우리는 주꾸미 2인분과 볶음밥을 시키고, 맥주도 한잔 했다. 매운 양념이 잔뜩 은 주꾸미를 마요네즈에 찍어 깻잎에 싸 먹으며 웃는 그녀가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첫인상보다 훨씬 더 털털했으나, 그렇다고 배려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딱 사랑스러울 만큼 그만큼만 털털했다. 그렇게 그녀가 학창 시절 자주 오던 맛집에서 우린 또 깊은 추억을 나눴다.



  맥주 한잔이었지만, 낮술은 조금 더 기분 좋은 취기를 갖게 해 주었다. 우리는 버스에 올라 다음 데이트 코스로 가는 중이었다. 바로 커플들은 한 번씩은 무조건 간다는 남산이다. 그녀의 동네에서 그리 멀지 않아 버스를 타면 30분 정도 걸리는 거리였다. 주말이었지만 버스는 휑했고, 우리는 맨 뒷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맨 뒷자리는 그날따라 유독 덜컹거렸다. 가는 길이 그런지 몰라도 몸이 들썩일 정도였다. 몸이 들썩이니 고개도 자동으로 끄덕거리게 되었다. 그렇게 서로 마주 보며 웃다가 덜컹거리는 타이밍에 나도 모르게(?) 내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가 닿았다. 그렇게 잠시동안 눈을 감고 교감을 나눈 뒤에 황급히 눈을 창 밖 풍경으로 돌렸다. 다행히 버스 안에서 우리의 역사를 본 사람은 없는 듯 몇몇 승객들의 휑한 분위기는 무관심했다.


  버스에서 내려서 천천히 타워 쪽으로 올라갔다. 다행히 날씨가 그리 춥지 않았고, 낮이라서 햇빛도 따스했다. 정상에 오른 우리는 일단 카페에 들어가 커피를 마시며 잠시 휴식을 취했다. 주말이라서 그런지 사람들이 꽤 붐볐고, 특히 커플들이 엄청 많이 있었다. 누군가 우리를 봐도 아마 커플이라 생각할 터였다. 그렇지 않아도 내 마음 오늘 꼭 고백을 하고 말겠다는 굳은 다짐이 있었다. 전망대에 올라가지는 않았지만,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중앙 무대에서는 사극에서 볼 법한 옛 장군 복장을 한 이들이 행진하며 공연을 하고 있었다. 잠시 구경을 하다가 우리는 외곽 울타리 쪽으로 갔다. 철제 나무와 울타리에 여러 모양의 자물쇠와 사진들이 꽂혀있었고, 사랑을 표현하는 여러 문구들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속으로 '이거다!'라고 생각해서 그녀에게 제안했다.


"우리도 자물쇠 하나씩 사서 걸어놓을까?"

"그래, 좋아!"


자물쇠 2개를 사 온 우리는 사인펜으로 서로 문구를 하나씩 쓰기로 했다. 그녀는 잠시 고심을 하다가 고개를 푹 숙이고는 내가 볼 수 없게 몸을 틀어 열심히 무언갈 써내려 갔다. 나는 속으로 이미 정해 놓았기 때문에 금방 썼다. 우리는 자물쇠가 많이 걸려 있는 나무 쪽으로 가서 각자의 자물쇠를 채웠다. 그제야 내가 쓴 것과 그녀가 쓴 것을 서로 읽어볼 수 있었다. 내가 쓴 문구는 '우리 오늘부터 1일 하자!'고, 그녀가 쓴 문구는 '내 옆에 있어줘서 고마워!'였다. 우리는 서로를 지그시 바라보았고, 그녀는 내게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말했다.


"그래, 오늘부터 우리 1일 하자."

"고마워, 나도 평생 너의 옆에 있어줄게."


우리는 서로를 뜨겁게 껴안았다. 누군가가 보았을 때도 우린 이제 완벽한 커플이었다. 리고 나에겐 오늘이 평생 잊지 못할 완벽한 하루였다. 렇게 행복한 나날들이 계속 이어질 거라 예상하며 만나던 어느 날, 그녀의 마음에 뜻밖의 불청객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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