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껏 표현해도 괜찮아요"라는 말을 듣다(ft. 연기 레슨)
고등학교 2학년 기말고사 기간에 같은 반 친구 한 명이 내 영어책을 훔쳐 쓰레기통에 넣은 것이 밝혀졌을 때 담임 선생님이 내게 하신 말씀이었다.
일련의 상황 내내 나는 단 한 번도 바깥으로 '화'를 표출하지 않았다. 언성 한 번 높인 적이 없다. 그저 교무실에서 선생님이 주시는 녹차를 홀짝이며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친구를 지켜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00이에게 사과 받았으니 됐어요. 00이 부모님한테는 이 일 말씀하지 말아주세요."
부모님 귀에 들어갔을 때 친구가 겪을 곤란, 그리고 이것을 전달하는 담임 선생님의 난처함을 동시에 고려한 말이었다. 내 말이 담임 선생님께는 매우 기꺼웠을 것이다. 일을 저지른 친구는 '살았다'하는 안도감에 멋쩍은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참 재미있는 것은 내가 내 감정을 미뤄놓고 담담하게 행동할 때 사람들은 '나봄이는 참 이해심이 많구나'라고 칭찬한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나는 내 감정을 심연 아래로 끌어내리는 것에 익숙해졌다.
친절하되 단호한,
장미처럼 품위 있는 나봄의 탄생이었다.
"마음껏 표현해도 괜찮아요."
소모임 어플에서 우연히 찾아낸 연기 수업에서 처음 들은 말이었다. 서늘한 요가 매트 위에 누워서 눈을 감은 채 연기 선생님이 하신 말씀을 듣는 순간, 지난 두 달 동안의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본의 아니게 갑작스럽게 휴직을 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서 가족들 모두 내 앞에서 엉엉 울었다. 그 앞에서 내가 가장 먼저 담담하게 한 말은 '괜찮아요. 대신 엄마, 아빠 말씀대로 좀 쉴게요.'였다.
피트니스 센터 홍보로 생각 없이 내가 골프 레슨을 하는 모습을 몰래 불법 촬영해 당근 마켓에 올린 21살의 직원. 그때의 나는 언성 한 번 높이지 않았다. 그저 조곤조곤하게 그녀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설명하고, 올라간 자료를 삭제하도록 지시했다.
울 것 같은 얼굴로 덜덜 떠는 그녀에게 내가 내민 것은 따뜻하게 데워진 두유 하나였다.
집안에 속상한 일이 있어 펑펑 울며 전화하는 엄마.
갑작스럽게 엄마의 난폭한 감정 표현을 2시간 내내 모두 받아내느라 심장이 파르르 떨렸다.
엄마가 겪은 일이 내 탓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나를 비난하는 엄마에게 내가 건낸 것은 '엄마도 엄마가 처음이잖아. 지금도 충분히 훌륭하심♥'이라는 메시지였다. 이 모든 과정들을 겪었음에도 그 누구도 내게 내 감정을 '마음껏' 표현해도 된다고 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저 나봄의 '이해심 많은 표현과 행동'에 감탄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마음껏 표현해도 괜찮아요."
이 말, 고작 그 한 마디가 레슨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나를 울렸다.
연기 선생님께서는 직장인들을 가르치면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이들이 모두 '감정을 억누르는데 익숙하다'는 점이다. 풍부하게 감정 표현을 해도 허용이 되었던 유년 시절과 달리, 20살이 넘어 사회 생활을 시작하게 되면 사회는 개인의 감정을 바깥으로 표현하는 것에 허용적이지 않다.
오히려 참는 사람을 감정을 표현하는 사람보다 높게 평가한다.
자신의 감정을 '절제'할 줄 안다는 명목으로 말이다.
그렇게 우리 모두 우아하게 피어나는 장미꽃 한 송이가 되어간다. 속에 가시를 품고 있지만 내보여서는 안 된다. 오로지 풍성하게 피어난 꽃잎만이 우리가 보일 수 있는 전부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연기 수업에 참가할 때만큼은 예외적이다.
배우가 배역의 희노애락을 사람들이 느낄 수 있을 만큼 강렬하게 표출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배우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제대로 몰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연기 선생님 말씀으로는 연기 수업을 시작하면 많은 사람들이 중간에 울음을 터뜨린다고 한다. 사회 생활을 하면서 단 한 번도 자신의 감정을 폭발시켜본 경험이 없어서다. 처음 감정이 폭발할 때 그것을 어떻게 주체할 수 없어서 눈물이 터져나온다고.
나는 그 눈물을 감히 짐작해본다.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되었을 때에야 감정을 마음껏 표출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주는 카타르시스에서 눈물이 기인했다.
"저는 우아하게만 살고 싶어요."
누군가 내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그 말 이면에 담긴 그녀의 희노애락의 무게를 알고 있었기에 허투루 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그때의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우아하게만 산다는 건 할 수 있는 것보다 할 수 없는 것들이 많아진다는 걸 의미해요. 사람은 때로 울 수도 있고, 때로는 욕을 할 수도 있고, 때로는 남들이 손가락질 할 만큼 비열해질 수도 있어요."
"나는 이 모든 행동들을 나쁘게 생각하지 않아요. 살고 싶어서, 살아남기 위한 발버둥을 어떻게 부정적으로 생각하겠어요?"
"우아하게만 산다는 건 이 모든 것들을 포기한다는 것을 의미해요. 그렇게 되면 내 속은 썩어 문드러질 거예요. 할 수 있는 것보다 할 수 없는 것들이 늘어나는 상황에서 어떻게 행복할 수 있겠어요."
그녀에게 했던 말을 나 자신에게 고스란히 돌려주고 싶었다. 네 감정을, 네 마음을 억누를 필요가 없다고. 마음껏 표현해도 상관 없다고. 다만 그 표현의 방식이 우아하고 세련되면 될 뿐이라고. 내가 내 감정을 세련되게 표현하는 방법 1가지를 알면 내가 속된 말로 'X랄'을 해도 되는 한 가지 정당한 명분이 생긴다고.
모두가 한 떨기 우아한 장미가 되고 싶어한다.
하지만 자신이 가진 가시를 내보일 수 없다. 그래서 속이 문드러진다. 그럼에도 웃어야 한다. 내가 웃지 않는 걸 다른 사람들은 반기지 않으니까.
그럼 그 장미는 어떤 결말을 맞이할까?
그저 화사하게 피어있을까. 아니면 곪아버린 속 때문에 뿌리 끝부터 천천히 시들어갈까.
그 결말을 감히 짐작하기에, 나는 한 송이의 우아한 장미가 아닌 단단한 다이아몬드가 되기로 결정했다. 우아한 장미와 달리 다이아몬드는 화를 낼 수 있다. 울어도 상관 없다. 미친 듯이 소리 질러도 된다.
그런다고 해도 다이아몬드의 가치는 떨어지지 않는다. 다이아몬드를 흠집낼 수 있는 건 오로지 다른 다이아몬드만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장미꽃을 이리저리 다듬어서 만들어진, 이제는 시들어버린, 공주의 화관을 벗어서 천천히 내려놓는다. 그리고 예전부터 담담하게 곁을 지켰던 다이아몬드 왕관을 조심스럽게 집어든다.
거울에 선 여인은 전쟁에서 승리한,
당당한 다이아몬드 왕관의 주인, 여왕이었다.